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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 은희

by 쿠키

'서은혜'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힌 편지는 꽤나 두툼했다. 문제는 이 집에 은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편지는 당연하게 숙희에게 전달되었다. 당연하게 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금은 황당했지만 그 편지의 주인이 숙희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숙희 본인조차도.


은희를 아는 누군가가 있었다. 은희를 통해 어느 날 숙희를 보게 된 그 누군가가 은희의 언니를 떠올리며 생각한 이름이 은혜가 아니었을까. 하는 게 두 오빠와 숙희의 추측이었다. 은희는 분명히 은혜가 아니니 숙희가 은혜일 거라는 추론의 근거는 사실 따지고 보면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숙희는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미인이었다. 이제 막 스물셋이 된 숙희는 작은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서구적인 마스크에, 적당히 마르고 적당히 큰 키를 하고 있었다. 숙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큼의 외모와 성격 덕분에 쪽지나 연애편지를 곧잘 받았고 어떤 사람은 숙희를 따라 버스를 내리기도 하였다.


반면 은희는 비쩍 마르고 고만고만한 키에 "인상파"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늘 시큰둥하고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은희 또한 작은 농촌마을에는 어울리지 않게 하얗고 말간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솜털 같은 노란 머리카락은 은희를 금방이라도 하늘로 띄워 보낼 것처럼 나풀거리고 있었다. 은희에게 인상파라는 별명을 붙여준 건 세 살 위의 언니, 숙희였다. 숙희는 은희에게 '인상파'라는 별명 외에도 '안경잽이'나 '송사리' 같은 별명을 붙여 부르기도 하였다.


숙희는-아주 어렸을 때조차도-은희를 돌봐준다거나 데리고 노는 일은 없었다. 은희는 주로 혼자서 책을 읽거나 멀뚱멀뚱 하늘을 올려다볼 때가 많았는데 언니와 오빠들이 안 놀아줘서 그리된 건지 은희가 혼자 있기를 마다하지 않아 언니와 오빠들이 놀아주지 않은 건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편지봉투는 풀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음에도 빵빵했다. 편지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펼쳤을 때 편지지의 크기가 매우 커서 편지지의 원래 용도가 무엇이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편지지는 줄이 그어져있지도 않았고 그림이나 색깔이 들어가지 않은 그저 하얀색 바탕이었는데 그 위로 미끄러지듯 지나간 파란색 하이테크포인트 수성펜의 글씨체는 감탄을 자아낼 만큼 달필이었다.


달필의 주인은 은혜 양! 하고 부르며 마음을 풀어놓았다. 은혜를 향한 마음을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호소하듯 그러나 담담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다섯 장이나 써 내려갔다. 그럼에도 적절한 여백 때문인지 절절한 마음 때문인지 편지글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지가 계속되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숙희는 주소를 몰라서가 아니라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몰라 답장은 하지 못했지만 내심 편지를 기다렸다. 편지는 일주일을 간격으로 네 통이 왔고 숙희와 은희는 편지를 함께 읽었지만 편지는 숙희의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숙희의 손을 거쳐 숙희의 책상서랍에 곱게 모셔졌다.


다섯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숙희는 새초롬이 편지봉투를 열었고 은혜라는 이름의 숙희에게 전해진 편지를 행복한 기분에 취해 소리 내어 읽어나갔다. 은희도 숙희의 왼쪽 어깨에 고개를 딱 붙인 채로 눈으로 편지를 따라 읽었다. 편지를 쓴 이는 답장을 하지 않는 은혜를 향해 아쉽고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숙희가 편지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다가 마지막 편지지를 펼쳤다. 늘 그렇듯 파란색 하이테크 수성펜의 섬세하고 촉촉한 감촉이 하얀 종이 위에서 단정하니 아름다운 필체를 두드러지게 했다. 다만 총총히 편지글을 마치는 인사와 함께 전에는 없었던 소녀의 얼굴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딱히 이쁠 것도 없는 소녀의 콧등 위로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숙희는 편지지를 원래대로 접어 봉투에 넣으며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답장을 썼다. 우리 집에 은혜라는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개봉된 편지 다섯 통이 동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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