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을 내다보니 도로가 촉촉이 젖어있다. 순간 작은 갈등이 머리를 들었지만 단번에 마음을 추스르고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뒤꿈치 윗부분에 아디다스 로고가 박힌 운동화에 발을 넣다가 그러고 보니 바지도 아디다스 삼선이 박음질된 운동복이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난다.
모자와 워머, 장갑을 챙겨 집을 나선다. 세상이, 가을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아파트 곳곳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빛깔을 피워내며 어우러지는 나무들로 울긋불긋, 새삼 오래된 아파트가 멋스럽다. 올해 유독 단풍이 예쁜 거 같다고 친구에게 말했더니 네 마음에 여유가 생겼나 보다! 라던 친구 말이 생각난다.
산에 막 다다랐을 때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는가 싶더니 비가 오네.. 싶게 내린다. 이런.. 어디서 비를 피한담.. 되돌아 집으로 가도 그만이겠지만 문득 생활체육시설들 근처 육각형 정자가 떠올라 부지런히 걷는다.
누군가 정자에 옥색 매트를 가져다 놓았다. 매트 위에 앉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다. 아무도 없다. 당연하지.. 이렇게 흐리고 비가 오는데..
정자 마룻바닥에 앉아 늘어뜨린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다가 누굴 부르는 소리 같은 새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까마귀 소린가? 우리 산에 까마귀가 살던가? 까마귀 소리를 닮았지만 확신하지 못한다. 가만히 소리의 임자를 눈으로 좇으니 본 적은 있지만 이름은 알지 못하는 새다.
문득 정자 밑에 누군가 나처럼 비를 피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흔들던 다리를 가만히 멈추고 재빨리 운동화를 벗어 손에 들었다. 오른쪽 운동화 바닥에 나뭇잎이 세 잎이나 묻었다. 운동화를 한 손에 하나씩 들어 바닥끼리 탁탁 털어보고 신발 옆구리끼리 탁탁 부딪쳐보기도 하지만 물로 칠이 된 나뭇잎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운동화를 바닥끼리 맞대어 정자 마루 위에 내려놓고 정자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멀리서 비에 젖어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후두둑 나뭇잎에 빗방울 돋는 소리도 들린다. 빗방울의 크기가 짐작된다. 나의 숨소리가 들린다. 아니 내 숨에 생각이 미쳤다는 게 마땅한 표현일 거 같다. 몸이 떨린다. 찬바람이 살 속을 파고든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을 뜨니 나뭇잎들이 정자 위에도 매트 위에도 내려앉았다. 조금 전 바람이 숲을 지나며 떨군 잎새들이다.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워보니 이미 여기저기 검어지고 구멍 나고 남루해져 있다. 그래도 마음이 간다. 아니 그래서 마음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빗방울들을 오래오래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