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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키 Nov 14. 2024

장구봉에서

장구봉에 오른다. 장구봉에서 알게 된 어르신은 산에 오다가 안 오면 산이 궁금해진다고 했다. 마라톤 같은 운동을 하면 중독성이 있어 자꾸 운동을 하게 된다던데 등산-등산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도 그럴까.


나는 어째서 가끔이라도 산을 찾을까.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 지금 내 입장에서는 적당한 답인 것 같다. 건강이 나쁘지는 않지만 조금씩 체력관리가 필요한 나이가 가까워오는 것 같기도 하고 신체적인 건강과 더불어 정신적인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선택한 게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 작은 산을 몇 바퀴씩 도는 거였다.


아파트를 나와 아파트 입구에 몰려있는 상가를 돌면 산의 초입이다. 초입에 깔아놓은 대리석 바닥-한 겨울 대리석 바닥은 반질반질 너무 위험하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대리석을 깔았는지 원-을 지나 나무 계단을 몇 개 오르면 '산돌이'가 시작된다. 산이 얼마나 작은지 산 둘레를 도는 동안 나는 마치 탑돌이를 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산에 올라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하는 햇살을 마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인 양 경탄하며 바라본다. 어느 나무줄기에선가 떨어져 나온 낙엽이 바람을 타고 바닥에 떨어질 때 나는 방금 떨어진 나뭇잎이 어떤 건지 골라낼 수 있다. 가시가 뾰족한 밤송이가 결코 고슴도치 일리 없음을 알지만 여전히 발밑이 두려운 나는 이래저래 산에 나무에 햇살에 나뭇잎에 참견을 하며 걷는다 해도 한 바퀴 15분이면 족하다.


한 바퀴를 돌았다. 집에서 나올 때는 좀 더 따뜻하게 입고 나올까 싶었는데 한 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땀이 비친다.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 바퀴를 더 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제법 나무 사이로 스며든 햇살에 얼굴을 디밀고 해의 싱그런 기운을 받는다.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다가 함께 딸려 나온 장갑이 바닥에 떨어진다. 장갑을 줍고 보니 한 짝뿐이다. 주머니에 남아있어야 할 장갑 한 짝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고 이런.. 장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마침 연세는 지긋하셔도 건강해 보이는 분이 내가 지나쳐 온 길 쪽에서 올라온다. 나는 장갑 한 짝을 내밀며 혹시 산을 도시는 동안 이런 장갑 한 짝을 보셨냐 묻는다. 그분이 엉뚱하게 오던 쪽이 아닌 앞 쪽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나는 일찌감치(?) 장갑을 떨어뜨리고 그제야 알아챘던 거다. 세 바퀴째를 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줄기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는 장갑을 마주한다. 누군가 알지도 못하는 장갑 잃은 자를 떠올리며 주워 올려주셨으리라..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다른 날보다 산을 도는 사람이 적다. 사람이 많은 날이라야 동시간대를 도는 사람이 예닐곱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전 7시 30분에서 8시 30분까지, 그나마 이때가 산이 가장 붐빌 때가 아닌가 싶다. 다섯 바퀴를 채우고 등성이에 드문드문 놓인 운동기구로 간다. 몇 가지 기구가 있지만 나는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기울어진 벤치처럼 생긴 운동기구에 방석만 한 매트 두 개가 톱니처럼 연결된 채 깔려있다. 오므린 다리를 높은 쪽에 굽혀 올리고 머리를 낮은 쪽으로 둔다. 피가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느낌이다. 피가 머릿속을 돌면 머리가 맑아지겠지?! 피가 돌면서 머릿속 탁한 생각을 쓸어갔으면 좋겠다.


산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건 여러모로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나뭇잎 사이사이 하늘이 찔끔찔끔 보이지만 유독 한 곳은 마치 숲 속의 빈터에서 바라보는 뻥 뚫린 하늘처럼 동그랗게 보인다. 구름이 수제비처럼 군데군데 있는 게 아니라 이불속 솜을 펼쳐놓은 듯 하늘을 덮었다. 두껍다가 얇고 하얗다가 잿빛이다. 나는 바람결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데 하늘 아래 구름은 서둘러 움직인다.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실제로 땅 위를 구르는 바람보다 하늘을 나는 바람이 힘이 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와는 전혀 다른 이유일수도 있겠지만 그쪽으로 지식이 얕은 나는 알지 못한다.


문득 청설모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지난겨울 오랜만에 산에 올랐을 때만 해도 나는 청설모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얼음' 상태의 나를 역시 '얼음'이 되어 바라보던 녀석들은 적어도 서너 가족은 되었던 거 같다. 나뭇줄기를 미끄러지듯 타고 나뭇가지를 날듯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며 장난치던 풋내기 녀석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나는 지레 겁을 먹고 녀석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나무아래를 지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나뭇가지 아래 누워 있어도 웬일인지 청설모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려 얼른 몸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낮은 곳에 머리가 위치하다 보니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좁고 기울어진 판때기 같은 운동기구 위에서는 어떻게 요령껏 일어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겨우겨우 일어나면서 왠지 내 꼴이 사나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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