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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백의 기대수명

by 쿠키

사과 상자 하나만큼의 쇼핑백이 나왔다. 손바닥만 한 것부터 웬만한 캐리어도 들어갈 만큼 커다란 종이가방까지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이다. 집을 샅샅이 뒤지면 사과 상자 하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비타오백 박스 하나쯤은 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쇼핑백들은 따로 또 같이 구석구석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베란다 한 귀퉁이에도, 냉장고 옆 자투리 공간과 장롱 위에도. 적당한 크기의 쇼핑백 속에 키 순서대로 차곡차곡 담겨 여기저기 보관된 쇼핑백들을 보며 참 정성스럽게도 내팽개쳐놨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쇼핑백들은 수많은 쇼핑백들 사이에서 질기도록 살아남은 녀석들이다.


색깔이 단정하고 크기가 적당한 일부는 손잡이가 떼어지고 필요에 맞게 재단되어 옷장이나 서랍장, 싱크대 속에서 바구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튼튼한 녀석들은 시골 부모님 집으로 보내졌다가 고구마나 감자, 양파 같은 채소나 마늘종과 깻잎 장아찌 같은 밑반찬이 든 반찬통이 담겨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닌 녀석들은 재활용장에 보내질 종이들이 하나씩 둘씩 담기다 가득 채워지면 함께 처분되기도 한다.


아무리 봐도 쇼핑백이 너무 많다. 거실에 펼쳐놓고 쇼핑백 감별에 나선다. 하나하나가 작품이다.

와인이 담겼던 백화점 쇼핑백을 바라본다. 와인을 선물 받았을 때 나는 이미 취하기 시작했었지 아마..

승리의 여신 니케의 영혼과 날개를 상징한다는 커다란 로고가 찍힌 나이키 종이 가방은 지금은 20대가 된 중학생 아들을 위해 샀던 롱패딩이 담겼던 것이다.


쇼핑백은 그 안에 담겼던 물건만큼이나 고이 모셔졌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 낡아지고 사라진 물건보다 더 온전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그 온전함에 그리고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쇼핑백을 다시 보관할 것, 시골에 보낼 것, 마구마구 사용할 것으로 구분을 한다. 나름 선별된 녀석들인지라 분류가 쉽지 않다. 마음을 굳게 먹고-이게 뭐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지 원.. -분류에 들어간다. 규칙은 단 하나,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이자.


나는 일단 어질어질하도록 색깔이 알록달록한 녀석을 제외시킨다. 이 녀석들은 죄다 시골행이다. 그리고 크기가 너무 작아 단 한 번도 소용에 닿지 않았던 쇼핑백도 제외시킨다. 이 녀석들은 어디에 활용을 할까.. 도통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께가 너무 두껍거나 얇은 것도 따로 빼놓는다. 이들도 시골로 보내지거나 우선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서랍이나 신발장 안에서 플라스틱을 대신했던 흐물흐물해진 쇼핑백도 개비한다. 새롭게 높이를 재고, 적당히 안으로 접어 넣어 만든 각 잡힌 쇼핑백이 매우 단정하다. 냉장고 야채칸 플라스틱 통을 빼버리고 쪼르르 놓아준 채소를 담은 쇼핑백들이 사랑스럽다.


쇼핑백 수가 대략 반의 반으로 줄었다. 사실 서너 개만 가지고 있어도 사는데 아무런 불편함도 지장도 없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해 열댓 개는 족히 남긴 것 같다. 도대체 얘네들을 어쩌면 좋을까.. 쓰임 받기를 기다리며 다시 집안 어딘가에 처박힐 쇼핑백들은 어쩌면 강산이 한 번 더 바뀔 때까지도 살아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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