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쀼의 세계

도전과 응전, 그 어디쯤에 사는 부부

by 쿠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친구는 스무 살에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 열두 명 중 한 명이다. 우리 열둘은 연락이 끊길 듯 이어지고 멀어질 듯 끌려 30년을 이어왔다. 열둘.. 일 년 열두 달, 하루 중 낮과 밤이 12시간씩, 열두 사도, 연필 한 다스, 십이간지 등등.. 모두 열둘이어서 좋다.


저녁에 풋살경기가 있어 차를 쓰겠다고 했던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두어 번 지나쳐가보기는 했지만 사실상 알지 못하는 J읍에 위치한 장례식장을 찾아가기 위해 버스 편을 검색했다. 네 정거장쯤 이동을 해서 환승 후 마흔세 번째 정류장에서 하차, 대략 100m가량 걸어가면 된다. 나보다 더 멀리서 오는 친구들도 있는데.. 마음을 다독이며 출발을 했고, 다른 친구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저녁 일곱 시를 기점으로 속속 모여들터였다.


J읍으로 가는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고, 나는 창 밖으로 스치는 낯선 풍경을 조금은 신기한 눈으로 훑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면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이 줄었다. 어느새 창밖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다들 자리에 앉고도 자리가 여유로울 정도로 한산해졌을 때 전화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바로 내 뒷자리 너머에서 나는 소리였고, 대략 50대 정도로 추정되는 걸걸한 여자분의 목소리였다.


여자가 말했다. "어디야?"

"응, 친구들 만나고 있어." 수화기 저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귀에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여자의 그것보다는 젊었고, 나는 아드님과 통화를 하나 하는 생각을 문득 했던 거 같다.

여자가 말하기를 "나 방금 버스 탔거든! 데리러 와."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대답했다. "나, 술 마셨어!" 목소리에 단호함이 묻어있다.

"oo아파트 앞으로 와!"

"나, 술 마셨어." 남자분이 자신이 술을 마셨다는 말을 여자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걸까.. 여자의 목소리와 단 1초의 틈도 주질 않고 똑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그니까.. ㅁㅁ아파트 말고, ㅇㅇ아파트 앞으로 오라고."

남자가 대답을 않는다. 남자도 우리들(?)처럼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있나 하고 생각한 걸까..

"밥은 먹었어?" 여자가 묻는다. 나는 조금 뜬금없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화기 너머 남자는 별 저항감 없이 대답한다.

"아니."

"집에 와서 밥을 먹던지! ㅇㅇ아파트 앞으로 데리러 오고, 알았지?"

"알았어." 의외로 남자가 순순히 대꾸한다.


어?! 이게 아닌데.. 남자가 여자에게 말린 건가?! 아니면 그냥 그들만의 이야기 패턴인가.. 남자가 금방 백기를 들어 뭔가 좀 헤싱헤싱하게 끝이 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건 모자관계는 아니라는 거였다. 엄마라고 부른 적도 없고, 아들이라면 한 번쯤은 불렸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을뿐더러 목소리가 여자에 비해 젊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목소리 자체의 색깔과 말투로 야기된 착시현상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무엇보다 분위기가 확실히 부부사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어쨌거나 여자분 승(勝).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었다. 여자는 확실하게 뭔가를 쥐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끊자는 말도 없이 끊으면서 했던 여자의 마무리 멘트가 압권이었다.

"술 마셨다고 이상한 데로 새기만 해봐?! 시간 맞춰 ㅇㅇ 아파트 앞으로 와!"


원튼 원치 않든 나를 포함하여 전화의 내용을 들었던 사람들 입에서 작은 웃음이 삐져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음에 틀림이 없는듯했다.

정말 알 수 없는 게 부부의 세계라더니.. 우연찮게 들여다보게 된 어느 부부의 단편, 우당탕탕 끈을 이어가는 부부의 해로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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