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오늘은 처음이야”
지난 2022년 tvN에서 방영된 <뜻밖의 여정>이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나요?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 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의 삶을 다룬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스크린 속 대배우가 아닌 평범한 사람 윤여정의 진솔한 삶을 보여주면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윤여정 배우는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수많은 어록을 만들어내며 일명 ‘여정적 사고’를 유행시키기도 했습니다.
“60세가 돼도 인생은 몰라요. 나도 처음 살아보는 거니까. 그냥 사는 거야. 그나마 하는 건 하나씩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나이들면서 붙잡지 않는 것.”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는 나! 나는 나같이 살면 된다.”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 난 웃고 살기로 했어. 인생 한번 살아볼 만해. 진짜 재밌어.”
오랜 시간 배우로 일하면서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윤여정 배우는 많은 배우들이 닮고 싶어 하는 롤 모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롤 모델이라고 말할라치면 손사래를 칩니다.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라”라고 말하는 배우의 시니컬한 말속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잃지 말라는 애정 깊은 조언이 느껴집니다.
윤여정 배우는 “나도 오늘은 처음”이라며 겸손하게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만들어가는 매일을 살아간 덕분에 지금의 윤여정 배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만의 깊은 통찰이 느껴지는 말을 통해 진짜 어른의 자세를 배워보면 어떨까요?
경남 진주에서 조용하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어른도 있습니다. 영화 <어른 김장하>의 주인공 김장하 원장입니다. 지역 방송에서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2023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60여 년 동안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해온 김장하 원장은 1983년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습니다. 그리고 1991년, 110억 원의 가치에 달하는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평생 힘들게 번 돈으로 지역의 발전을 위해 기부하고 후원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자신이 일군 업적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인터뷰를 하다가도 기부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꾹 다물어버립니다. 결국 김장하 원장의 다큐멘터리는 그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릴레이 증언들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줬으면 그만이지 보답받을 이유가 없다.”
“이 사회의 것을 네게 줬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아라.”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그리 살아가면 돼.”
<어른 김장하>를 제작할 당시, 단 하나의 조건으로 “절대 자신을 우상화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했다는 김장하 원장의 일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는 본인의 신념에 충실하며 살아왔음이 느껴집니다. 존경하고 따를 만한 어른을 찾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김정하 원장의 선행은 더욱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에게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이제 한약방의 원장직을 내려놓은 그에게 어떤 호칭이 어울릴까요? 김장하 이름 뒤에는 그 누구보다도 ‘선생’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이미 정점을 찍고도 계속해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노장들의 모습을 보며 소설 <데루코와 루이>의 두 주인공이 떠올랐습니다. 평생 자신의 이름보다는 남편인 도시로의 아내로 불리며 살아온 데루코가 남편에게 “잘 있어요. 나는 이제부터 살아갈게요”라고 남긴 편지를 읽다 보면 마치 우리 할머니처럼 느껴져서 무한 응원을 하게 되기도 하고요. 노인이라고 무시하며 위협하는 젊은이를 만났을 때 “할머니인 줄 알면 노인 공경이나 할 일이지. 웃기고 자빠졌네, 정말!” 하며 더 큰 소리로 받아치는 루이를 보면 카리스마 넘치는 걸 크러시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홀딱 반하고 맙니다.
때로는 짜릿할 만큼 시원 통쾌하고, 때로는 가슴이 저릿할 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말들로 가득한 소설 <데루코와 루이>를 만나보세요. 누군가는 끝을 향해 간다고 여길지 모르는 일흔 살에도 얼마든지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랑스러운 두 여성의 이야기와 유쾌하면서도 뭉근한 감동이 함께하는 어록들은 덤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