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 손목도 고장 났는데 심장은 너무나도 잘 뛰는 3일 차
#1. 파리
유럽여행이 이렇게 피로한 거였나.
발도 손목도 고장 났는데, 심장은 너무나도 잘 뛰는 3일 차.
여행을 할 때면 드는 생각.
내가 이렇게 쉬운 사람이었나.
내가 이렇게 쉽게 행복해하는 사람이었나.
365일 중 찰나의 행복한 기억들로 나는 살아간다.
나는 이걸 여행적 낙관주의라고 부르기로 한다.
팬데믹 후 약 4년 만에 찾은 유럽. 늘어난 비행시간의 여파로 시작부터 피로했고, 그동안 그리웠던 곳들과 새로운 곳들을 돌아보고자 끊임없이 걸어서 초반부터 발이 아파왔다. 구글맵을 보느라 휴대폰을 한 손에 계속 들고 돌아다닌 탓에 손목 통증 또한 시작되었던 날이었다. 갑자기 신선한 굴이 먹고 싶어 찾아간 식당에서 굴과 조개, 새우를 주문하고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다. 살짝 알딸딸한 상태로 해가 질 무렵 퐁피두 센터와 파리 시청사를 지나 세느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곳에 다시 왔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평소에 나는 왜 이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왜 그만두고 떠나오지 못하는지 생각하며 비관을 하는 순간들이 분명 많은데, 여행지에서 사소한 것에도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웃음이 난다. 여행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소소한 감동을 수시로 받는 것일까.
그날의 시작은 도서관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는 리슐리외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 Richelieu). 정보를 많이 찾아보지 않고 가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눈치껏 현지인들을 따라 줄을 섰다. 5분 후, 드디어 오발룸의 문이 열렸다. 감탄. 천장의 오발형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와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 그리고 각 책상마다 놓여 있는 민트색 스탠드까지. 어디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아직 빈자리가 있어서 잠시 앉아 볼까 고민했지만, 오픈런으로 와서 자리를 잡아야 하는 현지인들을 방해하기는 싫어서 한 바퀴 돌아보며 사진을 찍었다. 미술 코너가 눈에 띄어 책을 꺼내서 들여다봤다. 한 사서분이 가까이 오길래, ‘외부인이 보면 안 되는 건가?’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말이 돌아왔다.
"원하는 책이 있으면 가져가서 자리 잡고 읽어도 되고, 자리에 앉아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The Oval room is yours."
전혀 생각하지 못한 환대에 감동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옳다. 어디에서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을 완성하는 건 공간만이 아니었다. 그 공간을 소중히 여겨서, 방문자들도 그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2. 암스테르담
파리에만 있으려다가, 앞으로는 예전에 안 가본 곳도 가기로 했으니 큰 기대 없이 암스테르담을 끼워 넣었다. 황홀한 파리와는 달리 암스테르담에 대한 첫인상은 기차역에 내리면서부터 마주한 흐리고 추운 날씨였고, 후회로 시작되었다. 첫날밤엔 아무런 기대 없이 잠이 들었다가, 예상외의 향긋한 빵 굽는 냄새에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네덜란드 음식은 별로라고들 하던데 따끈한 빵은 꼭 먹어야겠다.
숙소 밖으로 나와 마주한 날씨는 놀랍게도 화창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운하를 따라 산책을 하고서 첫 목적지인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으로 향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술관이자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아서 네 시간이나 있었는데, 중간중간 창 밖으로 내가 좋아하는 마그리트의 그림 같은 하늘이 보여서 자꾸 시선을 빼앗겼다.
지금 창 밖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풍차가 서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 미술관의 대표작 중의 하나라는데, ‘우리나라는 회색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작가가 그린 네덜란드의 여름 풍경이었다. 어제 보니 회색 맞던데? 웃음이 나왔다.
이 작품을 봤기 때문일까. 다음 날, 별거 있겠냐며 안 가려던 근교 풍차 마을인 잔세스칸스로 향했다. 네덜란드 화가가 그림으로 남기고자 했던 풍경을 직접 보고 싶었다. 도시를 벗어나 잔세스칸스로 향하며 본 풍경은 마음을 들뜨게 했다. 푸르른 나무들 사이로 작은 집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다시 초록과 하늘로 가득 찼다.
드디어 목적지 도착.
버스에서 내리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오는 길에 보았던 하늘색은 사라지고 온통 회색이 되었다. 얼른 카페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괜히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를 피할 겸, 네덜란드의 빵을 먹어볼 겸 커피와 크루아상을 주문했다. 분명 반달 모양의 크루아상인데 버터가 최소로 들어간 듯한 정직한 빵이었다. 아 여기 네덜란드였지. 게르만 계열의 나라를 여행을 한지 한참이나 되어서 잊고 있던 빵 맛이었다.
조금 지나자 비가 그치고 하늘색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쌍무지개가 반겨주고 있었고, 그림에서 보았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느새 맑아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 그 하늘을 배경으로 돌아가는 풍차, 풍차 앞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강까지. 어제 본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풍경을 보는데 갑자기 기대보다 더 큰 감동이 몰려오며 복받쳤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예상 외의 감정에 살짝 불안하기까지 했다. 내 행복을 지금 이 순간에 다 끌어다 쓰고 있는 건 아닐까. 계속 화창한 날씨였다면 감동이 덜했을 것 같은데, 밀당을 하듯 흐리고 비가 오는 날씨에서 정반대의 햇살이 이어져서 였을까. 한 순간에 그 풍경에 푹 빠져버렸다.
그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버스를 타러 가려다가 10분만 더 있자며 조금 더 걷고, 10분이 지나자 다시 10분만,을 반복하며 결국 한 시간을 더 걸었다. 더 머무르다간 정말 떠나지 못할 것만 같아서, 다음엔 이 근처에 숙소를 잡자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고 버스를 탔다.
근처 마을 잔담에 도착해서 우선 카페에 들어갔다. 비를 맞은 탓에 한기가 느껴져 따뜻한 차와 함께 스무디볼을 주문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날씨가 그레이-스카이-레이니-스카이-그레이-레이니-스카이 아주 널을 뛰는데, 결론은 오늘은 좋다, 행복하다,라고 일기를 썼다.
카페에서 나와 레고로 지은 듯한 독특한 건물들이 있는 마을을 산책하는데 갑자기 우울해졌다. 내 행복을 풍차가 돌아가는 그 평화로운 마을에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안 되겠다. 여행적 낙관주의를 쓰자. 이건 미래에서 끌어다 쓴 행복이 아니라 그동안 적립해 둔 행복을 찾은 것이다. 기다렸던 만큼 더 아름답게 피어난 행복.
지금의 감동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쌓아가다 보면 다시 이러한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행복을 온전히 즐기자. 이미 나는 이곳에서 기대 이상의 선물을 받았다. 혹여나 다시 오지 못하더라도, 이미 내 마음속에 담아둘 네덜란드의 여름 풍경을 만났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근교 여행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운하 위로 뜬 커다란 쌍무지개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다리 위에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날이 흐려지더니 비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인생이 늘 스카이일 순 없다. 때로는 그레이, 때로는 레이니, 그러다가 무지개가 반짝. 맑은 하늘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비가 온 뒤 무지개가 뜨듯이 나의 삶도 때때로 우울하고 슬프지만, 그런 순간이 있기에 이어지는 무지개가 더 감동적인 법.
여행지에서 만나는 감동적인 순간을 기억하며, 또 기대하며 오늘도 널을 뛰는 내 인생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