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정도 혼자 여행을 간다는 말을 들은 어떤 친구가 말했다. “20끼를 혼자 먹어야 되는 거야?” 혼자 여행을 하려면 혼밥을 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 혼밥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이번 여행이 ‘20번의 혼밥’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딘가 쓸쓸하고 쓸쓸하고 쓸쓸할 것만 같은.
첫 여행을 혼자 떠나서였을까, 수시로 혼자 떠난다. 혼자 여행을 시작한 지 2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도, 혼자 여행을 간다는 것에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많고 무슨 재미로 혼자 여행을 하느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내게 혼자 하는 여행은 그 장소에 대한 추억을 쌓는 것이고, 동행이 있는 여행은 그 사람과의 추억을 쌓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년 혼자만의 여행 계획을 꼭 세우고, 특히 처음 가는 도시는 혼자 가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다행히 나는 혼자 잘 논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꼭 쓸쓸하지 않다는 건, 혼자 떠나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조금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의도하지 않아도 동행이 있는 여행보다 더 쉽게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혼행이다. 식사 한 끼일 때도 있고, 반나절일 때도 있고, 며칠 연속으로 만나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인연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대부분 내가 먼저 말을 걸기 보다(애초에 혼자 있으려고 혼자 갔으니 말을 걸 일이 잘 없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많았는데(하지만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는 친절하다.), 어쩌면 내가 도를 아는지 물어보고 싶게 생긴 얼굴인지 잠시 생각해 본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미술관을 돌아보고 나서 쉬고 있는데,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이 예쁘다며-그 지역에서 유명한 디자인이었다, 어디서 샀냐고 물어오는 외국인과 며칠 같이 놀고는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가 다음 해에 한국에 와서 우리 집에서 머물렀던 적도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일일 투어에 참여하거나 여행카페에 올라온 식사모임에 참석해서 만난 여행자들과 말이 잘 통하면 며칠 같이 다니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그리고 정말 그냥 길에서 마주친 사람과 밥을 먹는 경우도 많다.
리스본
평소 나는 근교 여행을 귀찮아하는 편이라,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무르더라도 1시간 정도 걸리는 근교조차도 미루고 미루다가 가는 경우가 많은데, 리스본에서도 두 번째 가서야 근교 신트라 지역을 돌아봤다. 신트라에서도 찾아가기 난이도가 다소 높은 아제나스 두 마르(Azenhas do Mar)라는 지역이 있다. 근교 가는 것도 귀찮은데 근교의 근교라니...라는 생각을 떨치고, 제시간에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겨우 찾아갔다.
그곳은 절벽 위에 지어진 짙은 오렌지색 지붕과 흰색 벽의 집들 옆으로 대서양이 펼쳐지는 환상적인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풍경을 배경으로 내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역시나 나는 혼자니까, 괜스레 풍경 사진만 찍으며 떠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분이 말을 걸어왔다. 한국말로!
혼자 왔냐며 반가움을 나누고 서로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고 있는데, 버스를 함께 탔던 외국인 두 명이 그들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주고 나니 우리 사진도 찍어주겠다고 하기에 괜찮다고 거절하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 방금 여기서 만났어요 ㅋㅋㅋ" 리스본도 아니고 신트라에서, 그것도 아제나스 두 마르에서, 지금 있는 네 명 중 혼자 온 두 사람이 같은 국적일 수가 있냐며 놀라워하며 그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 한국분도 나도 한동안 한국말을 못 한 상태여서 선 채로 끝없이 수다를 이어가다가, 혼자여서 갈지 말지 고민을 했던 전망 좋은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혼자라면 주문하지 못할 피쳐 사이즈의 상그리아를 주문해서 곁들여 마셨다. 가볍게 여행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각자의 고민으로 이어졌다. 때로는 낯선 사람에게 더 쉽게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이어서 혼자라서 갈지 말지 고민했던 또 다른 장소인 호카곶에 가서 끝내주는 노을을 보고 숙소가 있는 동네로 돌아왔다. 같이 포트 와인이라도 한잔 할 타이밍이지만 둘 다 체력이 바닥나 있었고, 다음날 일정도 있으니 서로의 남은 여행이 즐겁기를 바라며 쿨하게 헤어졌다.
경주
혼자 하는 여행에서 신경 쓰는 포인트 중 하나는 혼술 장소 찾기인데, 평소에는 혼술을 거의 안 하지만 어쩐지 여행지에서는 가벼운 술을 마시며 그날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어 진다. 어느 봄날에 찾았던 경주에서 숙소 근처 지도앱을 둘러보다가 한 가게가 눈에 띄어서 가봤다. 그냥 다양한 맥주를 파는 곳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혼술러들이 자연스레 어울리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날은 작가 레지던스에 머무르고 있는 경주 출신 단골과 수도권에 살면서 종종 그 동네에 알바를 하러 온다는 다른 단골, 여행을 할 때면 수제 맥주를 파는 곳을 찾아 다닌다는 서울에서 온 여행자, 그리고 이런 상황이 익숙한, 사장님의 대타인 남편분이 있던 날이었다. 바에 둘러앉아 자연스럽게 한 분이 포장해 온 떡볶이와 튀김을 나눠 먹으며, 맥덕(맥주덕후)분들의 추천을 받아 다양한 맥주를 마시며 계획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혼자도 괜찮으니 혼행을 떠나는 것이고 원래도 고독을 즐기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관광지에 넘쳐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시간을 보낼 때면, 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 어색한 순간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이런 공간을 발견하고 때로는 낯선 사람들과 수다 떠는 시간까지 보내고 나면, 세상에는 옳은 길이 아닌 다양한 길이 있고, 각자가 선택한 길 위에서 각자의 속도로 걸어가는 이들 또한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혼자 떠나도 괜찮다는 마음이 충전된다.
강릉
평소에 일출보다는 일몰을 선호하는데, 어느 겨울에는 어쩐지 동해에 가서 일출을 보며 새해를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박 3일로 속초와 강릉에 갔다. 12월 31일에 묵을 곳은 강릉의 한 해변 바로 앞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외국 여행 중에 볼 법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숙소였다. 사람들과 어울려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저녁까지 시내를 돌아보고는 약간 늦은 시간에 숙소에 갔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인사를 나누고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누군가의 주도로 처음 본 사람들과 새해 포부를 발표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자정에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를 빌며 카운트다운을 하고 해변으로 나갔다. 먼 곳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아직 잠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해변에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오래오래 이야기를 이어갔다.
원래 목적이었던 새해 첫 해돋이를 보고 잠이 들었다가 누군가가 내린 향긋한 드립 커피 향에 잠을 깨고, 해장 컵라면을 먹고 솔밭을 산책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되자 어제 친해진 분들이 같이 돌아가자고 했다. 그렇게 원주에서 혼자서 운전해서 온 분의 차에,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온 세 명이 타서 함께 원주로 출발했다.
6번 국도를 따라 대관령을 넘어가는 길에는 새해 첫 눈꽃이 만개해 있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면 보지 못했을 아름다운 설경을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오늘, 이 길 위에서 말하는 건 모두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모두가 설레는 표정으로 저마다 가지고 있던 바람을 꺼내어 놓았다.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혼자 가서 넷이 되어 돌아간다는 무시무시한 동해여행. 게다가 길 위에서 말하는 건 모두 이루어진다는 무시무시한 6번 국도를 타고 돌아왔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원주까지, 6번 국도 위에서 새해의 첫날을 스펙터클 하게 보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름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과, ‘모두에게 복된 새해’를 외친 덕에 김연수 소설 같은 한 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에는 조금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조금 더 수다스러워지기로 한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은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이고 싶은 순간을 선택하는 것까지도. 이것은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유로움. 이 자유로움이 좋아서 나는 계속해서 홀로 길을 떠난다.
그리고 혼자이기에 경험할 수 있는 뜻밖의 순간들도 있다. 이것은 홀로 떠나는 것을 택한 이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우연이 주는 선물 같은 순간순간을 통해 혼자 떠나는 여행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된다.
혼자여도 좋고, 혼자가 아니어도 좋다. 어느 새해 첫날 6번 국도에서 바랬던 것처럼 나의 여정이 계속 이어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