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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슈타트로 가는 길에서 천사들을 만나다: 잘츠캄머굿

by 지예하




눈이 내린다. 평소에 눈 오는 날을 즐기지 않는데, 유난히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중 들리는 ‘눈’이라는 소식은 잠시 마음을 설레게 했다. 고요한 새벽. 많은 눈이 내리고 있으니 출근길에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는 재난문자를 보고선 창문을 연다. 차가운 공기를 한 모금 들이마신다. 소복소복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릴까 기대했지만, 이미 비로 바뀌었는지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눈이 쌓인 풍경을 만난 여행지를 떠올려본다. 올해 초 강릉에 가던 길. 꽤 오래전 속초여행에서 갔던 겨울 설악산. 보통 추울 땐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가곤 했던 터라, 기억을 더 거슬러 올라가 아주 예전에 떠난 겨울 유럽 여행에 도달했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던 중 기차 창 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산의 풍경에 감탄했다. 그곳에서 새하얀 풍경과 어울리는 존재들을 조우했다.






잘츠부르크를 떠나 할슈타트로 향한다. 창 밖은 온통 눈이 쌓인 풍경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눈. 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렇게 로맨틱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를 기대해 본다. 할슈타트에도 눈이 왔을까?

바트이슐 역에서 환승을 했다. 곧 기차가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조금 일찍 도착해서 승객을 기다리는 기차라고 생각하고 탔는데, 예정시간 보다 일찍 출발했다. 같은 플랫폼을 공유하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기차였다. 절망에 휩싸여 차장 아저씨를 기다렸다. 상황을 설명했더니 웃으며 다음 역에 내려서 열차를 타라고 한다(천사 1).



Ebensee. 내가 내린 낯선 곳이었다. 그곳 역장 아저씨는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나를 반기며 다음 열차가 45분 뒤에 있다고 알려주신다(천사 2). 속상한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푸념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온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대여섯 명의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흰색 옷을 입고 흰색 가발을 쓴, 등에는 날개가 달린 천사 무리가 맥주를 마시며 화려하게 꾸민 파란색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고서는, 한 천사가 반겨주며 말을 걸어왔다(천사 3). 독일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바디 랭귀지를 곁들여 같이 사진을 찍자는 말에 천사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잠시 소란 속에서 신나는 음악을 따라 리듬을 탄다. 찰나의 만남이었지만, 기차를 잘못 탄 상황에 대해 자책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잘츠캄머굿이 어떤 곳인지 예고편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천사 무리를 떠나 플랫폼으로 돌아갔다. 천사 2 역장 아저씨가 내가 타야 할 기차가 들어오자 알려주셨다. 고마움을 전하며 기차를 타서 편안한 마음으로 바깥 풍경을 본다. 빛나는 새하얀 눈과 어울리는 이들과의 조우로 내 마음은 평화로 충만해졌다.



천사들이 사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 잘츠캄머굿.이라고 이름표를 붙여 본다.






드디어 할슈타트에 도착했다. 축제가 있는 날이라 다양한 모습으로 분장을 한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나름 장기여행이었고, 겨울여행이었기에 숙소를 미리 정하지 않고 도착해서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분주함에 조금 당황했다. 캐리어를 끌고서 사전에 알아두었던 첫 번째 숙소에 가본다. 아무도 없다.

다시 큰길로 나와 중앙 광장으로 가는 길에, 내 빨강 캐리어보다 조금 작은 보라색 캐리어를 끌고 있는 여행객으로 분장한 사람과 마주쳤다. 서로를 발견하고선 웃음이 터졌다. 다정하게 나란히 선 후, 캐리어를 앞에 나란히 놓고 각자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남겼다.


미리 알아온 숙소들을 하나씩 찾아가 보다가, 아름다운 겨울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seeblick double room을 찾았다. 드디어 나의 안락한 방에 짐을 풀었다. 이곳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천사 4 할아버지가 도움을 주셨고, 마을에서는 천사 5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유독 친절한 사람들을 여럿 만난 하루였다. 처음에는 그저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Ebensee에서 만난 천사 무리들 덕에 모두 천사가 되었다.


저녁을 먹으러 찾아간 피제리아에서 아까 빨강 캐리어를 끌고 있던 아저씨를 다시 마주쳤다. 반겨주시더니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4시간 전에 나와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코팅까지 해두신 거였다. 유럽에서, 이 작디작은 마을에서 이게 가능하다니. 아저씨를 따라 독일어 “Super!”를 여러 번 외쳤다.



축제가 끝난 평일의 시작. 작은 마을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본다. 이 마을의 가장 대표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장소에 가서 눈이 쌓인 호수와 마을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긴다.

근교 마을을 가려고 했지만 버스를 놓쳤고, 다른 전망대를 찾아갔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입장이 불가능했다. 계획했던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어제 만난 천사들의 기운으로 평온해진 나는 그저 할슈타트의 고요함을 즐겼다.



안개 가득한 아침. 이곳을 떠나 큰 도시로 가는 날이다. 내가 떠나려는 걸 알고, 마치 모든 걸 다 보여주면 더는 아쉬워하지 않을까 봐 안개를 동원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것 같다. 다음에 또 찾아올게. 그땐 따뜻한 햇살과 함께 반겨줘. 기차역으로 향하는 페리에서 호수와 마을을 바라보며 인사를 한다. 기차역에 도착해서 두 번, 세 번 플랫폼과 기차시간을 확인한 후 알맞은 기차에 올라탔다.


내가 소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자연의 소리만 들리는 곳.

때로는 그 자연의 소리마저 멈추는 곳.

호숫가에 자리 잡은 마을과 눈 덮인 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모든 걱정을 잊고서 평온해지는 곳, 할슈타트.


그곳에서 만난 겨울 풍경이 그리운 날이다.






그로부터 8년 뒤, 다시 잘츠캄머굿을 여행했다. 그동안 천사와 조우한 눈 쌓인 풍경은 잊고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늦봄의 할슈타트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듯이 아름다운 푸르름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림을 그렸던 곳으로 가서 다시 한번 호수를, 마을을 바라본다. 새하얀 겨울의 고요에서 초록빛이 무성한 여름으로 향하는 생기로 가득 찬, 계절의 빛을 잔뜩 머금은 장면이 펼쳐졌다.

햇살을 받으며 언덕을 오르내려 마을을 돌아본다. 꽃과 나무가 작은 마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호숫가에서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얼굴에 온화한 바람이 스친다.






스쳐가는 나에게 선뜻 마음을 내어준 천사들을 생각한다. 나도 여행 중에, 또 일상에서 마주친 낯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던 순간도 떠올려본다. 천사로부터 받은 온기를 다른 이에게 나눈다. 그렇게 어디선가 시작된 가벼운 호의가 사람과 사람을 거쳐가며 지구를 여행하고 있다. 어느 때에는 고요하게, 어느 때에는 생생하게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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