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남은 2024년, 매일매일 나에게 고한다 [8]
나에게는 병이 한 가지 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병.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소음의 여백을 견디지 못하고, 그 빈 곳에 계속해서 뭔가로 채우려고 한다.
눈빛만 봐도 통하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극도로 친밀한 사이의 침묵은 자연스럽다. 침묵조차 여유로 즐길 수 있는 극소수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나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쉴 새 없이 내 목소리로 그 여백을 메꾸는 것이다.
계속해서 웃고 떠드는 나를 보면, 굉장히 잘 적응하고 있구나, 편안하구나, 라고들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는 혼자 낯 가리는 중인 거다. 그래서 내가 내향형이라고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상은 지나고 나면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말대잔치이자, 일종의 혼수상태의 수다랄까?
사람들 속에서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사회에 제법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말을 많이 하면 그만큼 실수할 확률이 높다. 떠들고 난 후의 나의 에너지가 고갈되고, 낮은 에너지 레벨의 상태에서 내가 했던 말들을 복기하고 있다는 거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됐을까, 걱정하며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다시 이야기를 꺼내려가다가도, 상대에게 별 것 아닌 이야기를 굳이 헤집는 것일 수도 있어 갈등만 하다 속이 타들어갈 때도 있다. 이럴 땐 내가 정말 소심하구나 생각한다.
또는, 어색함을 메우려 쓸데없는 빈 말들을 늘어놓다 결국 실없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의미 없는 대화가 억지스럽게 이어질 때는 괜히 시작했다며, 정말 이걸 어디서 끊어야 할지 갈등한다. 말에는 무게가 있는 법인데, 빈 말을 쉴 새 없이 꺼내다 가벼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 대화를 나눈 뒤의 나는 공허함을 느낀다.
우리가 으레 ‘사람 참 괜찮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허튼소리를 잘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단정하고 간결하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무게감이 느껴지고 신뢰가 생긴다.
예전에 같은 직장에 다녔던 A는 나보다 선배였고, 옆 팀의 리더였다. 그 사람은 같은 직급의 또래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늘 단정한 모습과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말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말에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들은 행동에도 군더더기가 없다는 걸 느꼈다. 역시나 그 사람은 늘 깔끔하게 정리된 결과물을 제시했고 사람들의 불필요한 잡음도 만들지 않았다. 때론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건조한 성격은 또 아니어서, 나는 여러모로 그 사람을 존경했다.
그로 인해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은 말이 곧 행동이 되고, 행동이 곧 말이 되어, 한 사람이라는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평소 말과 행동 덕분에 어떤 의견을 제시해도 더욱 설득력 있게 들렸고, 신뢰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침묵할 필요가 있다. 소음의 여백을 받아들이고 불필요한 말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뱉어내는 말들은 자꾸만 무게를 잃고 공중을 떠돌다 소음의 여백의 메우기는커녕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말이 무게도 잃고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필요할 때만 필요한 말을 하는, 침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떠들 때 쓰는 에너지를 반만 모아도 하루에 글 몇 편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또 어딘가에서 불필요하게 침묵을 소음으로 채우는 모습을 발견하시거든, 이 글을 상기시켜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