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나머지는 노래 속에 없어도 되는 것처럼
한 소절
흘러간 노래가 있다.
할아버지가 흥얼거리시던 노래
이런 질문이 나온다.
"아니면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같은 노래에
같은 질문이 나온다.
노새와 돼지로 단어만 바꾼.
그런데 종종 내 머릿속에 맴도는 부분은
물고기 부분이다.
딱 그 한 소절만.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마치 노래의 나머지는
노래 속에 없어도 되는 것처럼.
- 패터슨의 시 중에서 -
가끔은 낯선 도시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되풀이 되는 일상에 매몰되어 감정이 무뎌지거나 아무런 변화도 없이 의무나 책임감에 젖어 하루 하루를 보낸다는 생각이 들때, 혹은 내일이 되어도 별반 오늘과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에겐 삶이 무의미해지고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싶은 무력감과 권태라는 감옥이 찾아온다. 하지만 여행도, 사람도 익숙해지면 일상이 되고 만다.
이럴 때 보면 좋을 만한 영화로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을 추천하고 싶다. 버스 드라이버인 주인공의 일주일간의 일상을 담아 그저 보여줄 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보고 나면 일상이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으로 찾아온다.
아름다움이란 그 대상의 실체보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아름다움에서 피어난다고 했다. 마치 7연으로 된 시를 읽고 난 것처럼 같은 패턴이 지속해서 반복되지만, 소소한 변주들 속에서 대상을 읽어내는 시선이 시로 탄생하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볼 때 이 영화는 한 편의 잘 짜여진 메타시처럼 느껴졌다.
잔잔하게 흐르는 영상에 단 하나 감정의 급류가 있다면, 시를 세상에 내놓기로 한 날, 공교롭게도 노트를 통째로 잃게 되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날벼락처럼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경험도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이 아니었던가, 그것 또한 그렇게 지나가는 일이라고 덤덤한 어조로 영화는 보여주기만 하는데 그렇지, 괜찮아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주는듯 위로가 된다.
말끝마다 ‘아 하’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일본인 여행객과의 조우가 이 영화에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패터슨이 시를 쓰고 있으며, 어떠한 상실로 인해 정체성이 흔들리는 상태라는 것을 눈치 챈 그는,
'난 ‘그냥’ 버스 운전사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에게 동기 부여가 될만한 대화와 노트 한 권을 선물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는 따뜻한 말과 함께.
감탄사를 연신 쏟아내는 그에겐 그만큼의 놀라운 세상이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시인임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시는 특별한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깊이 감탄(표현)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시인이다.
시로 뭔가를 이룰 것처럼, 혹은 이룬 것처럼 시부심 가득한 행위의 주체가 시인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발견하고 써 나가는 행위‘, 그 행위 자체에 의미가 깃듦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당신은 시를 좋아하시는군요.’ 라고 묻는 패터슨에게 답하던 그의 마지막 말이 내 안에 문장으로 박혀 있다.
‘전 시로 숨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