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누군가 더 이상 너의 꿈이 무어냐고 묻지 않는 것’이라던 어느 소설가 말이 맞다면 나는 어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른’이라는 완성 퍼즐 같은 단어를 붙이기엔 아직 맞춰야 할 조각들이 너무도 많아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도 내 꿈을 묻지 않는' 팍팍한 시기에 아직 맞춰지지 않은 인생의 조각들을 집어 '어른의 놀이'란 걸 시작한다. 삶이란 다 맞춰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조각을 껴 맞춰 보는 분주한 움직임 속에 나아가는 미완의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꿈이라는 무지개를 좇기엔 너무도 훌쩍 커버렸고, 부쩍 자란 키만큼 이룬 것은 별로 없을지라도 삶이란 견뎌내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히 멋진 어른이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내 손에 들린 스페인행 비행기표, '여행'이라는 조각을 들고 있음은 그 자체로 놀이이자 삶이다.
언제부턴가 ‘놀이동산’이란 말보다 ‘여행’이라는 말이 더 설레고 기분 좋게 다가왔다. 놀이동산에서 먹는 구름 같은 솜사탕이며 추로스의 달짝지근함보단 어디론가 훌쩍 떠나, 미지근한 보온병 물에 탄 믹스커피 한 잔이라든가 허름한 휴게소에서 먹었던 따뜻한 가락국수 한 사발이 더 그리워지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여행에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나 바이킹 주는 스릴 넘치는 재미나 회전목마가 주는 클래식한 낭만이 항상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저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의 한 부분을 이곳 아닌 저곳에서 맞는다는 게 좋을 뿐이다. 또한 여행은 타인으로부터 철저하게 조작된 재미를 수동적으로 즐기는 놀이동산과 달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환상이자 끝을 모르는 놀이터라는 점에서 좀 더 고차원적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느끼고 싶은 재미만큼, 돈이든 시간이든 그에 따른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아주 냉철한 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후달릴 때가 아닌 심장이 두근거릴 때, 한 살 이라도 어릴 때 '여행'의 조각을 집어 들라고 말해주고 싶다. 천양희 시인은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네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라고 말했다. 시인의 말마따나 삶이 밥이라면 여행은 필시 잡곡이 되어 줄 것이다. 뭐가 됐든 간에 마냥 흰밥 같은 지루한 삶보다는 콩이든 수수든 뭐라도 들어간 밥이 맛도 좋고 영양가도 더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