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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계획이 다 있으시군요.

<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 당선작

by 유영해

시아버지는 시류를 타는 사람이었다. 한식당이 대부분인 시절, 마을에 몇 없는 서양식 레스토랑을 개원해 맛집으로 성공하셨다. 남편은 그 집 장남으로 태어나 이쁨을 듬뿍 받고 자랐다. 당시 아이들이 특별한 날에 엄마, 아빠를 졸라 짜장면을 먹었다면, 남편은 "오늘도 돈가스야?"를 외치며 풍요롭고 건방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IMF가 찾아왔다. 전국의 수많은 가게가 셔터를 내렸다. 시아버지의 레스토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러 가게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고 몇 번의 창업을 시도하셨다. 하지만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자영업자들 속에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란 쉽지 않았다. 남편이 함께 일했던 시절에도 수고에 비해 얻는 것은 적었다. 결국은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가게를 정리하셨다. 미래를 고심하던 중에 코로나 사태마저 터져버렸다. 새로운 가게를 열 엄두도 내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됐다. 결국, 시아버지는 다른 길로 눈길을 돌리셨다. 그 선택이 바로 주식이었다.


갑자기 웬 주식일까.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간다. 시어머니와 절연 상태였던 친정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리멸렬한 재산싸움 끝에 어머님은 유산을 일부 물려받으셨다. 코로나로 칩거 생활을 하시던 시부모님은 눈앞에 놓인 목돈을 깊은 고민에 빠지셨다. 운명처럼 알게 된 주식이라는 세계를 접하고 "이게 정말 돈이 되는 걸까?" 하며 반신반의로 시작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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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전문가들의 분석을 참고했지만, 처음부터 큰돈을 벌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손실을 겪으며, "역시 이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하고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드셨다고 한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하나에 몰두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날마다 신문과 뉴스를 탐독하고, 외국 논문까지 찾아 읽으셨다.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신해 전기차 공급이 많아질 거라 예상한 아버지는 고심 끝에 2차 전지 관련 주식을 매수하셨다. 주가가 폭락해 불안한 날도 있었지만, 오히려 추가 매수를 감행하셨다. 결국, 당신의 판단은 적중했다.


처음에는 소소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계좌의 숫자는 변해갔다. 남편과 방문한 시댁에서 자랑스레 내미신 주식 창을 보고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그간 고생하신 걸 알기에 더욱 감격스러웠다. 남편은 그저 무심하게 "잘됐네."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속으로 얼마나 기뻤했을지, 그리고 안도했을지는 입꼬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유쾌한 기적 덕분에 우리는 한동안 들떠있었다. "우리도 해볼까?"란 말이 장난처럼 오갔지만, 남편이 승선한 뒤로 차츰 잊혔다. 어차피 그 행운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그저 촘촘한 매일을 이어가는 게 최선인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이사를 고려했다. 숨 막히는 소음 전쟁에서 벗어나려 기류를 읽는 와중에도, 마음은 주식처럼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그냥 확, 떠나버리자고까지 생각한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걸려 온 아버님의 전화 한 통이 결심을 흔들었다. 시부모님의 한 방이 우리의 이사마저 한 방에 날려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이란 건 참으로 단순하지 않았다.


얘야, 나중에 너희한테 재산을 물려주면
재산세가 어마어마하게 붙더라.
차라리 너도 주식 투자를 한번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어휴, 아버님. 저는 자신 없어요.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천천히 따라오면 되지.
네..? 아... 그래도...
차근차근 공부하면서 하면 돼.
혹시 시드머니는 얼마나 있니?


시드머니라니. 참기름 고소한 육회를 무쳐주던 아버님은 어디 가고, 여의도의 애널리시트를 만난 듯 심장이 떨렸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일었다. 그저 아끼고 저축할 줄만 알았지, 돈을 잃을까 봐 걱정돼서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투자 방식이었다. 남편과 상의해 봐야겠지만, 그 또한 나 몰래 코인에 손댔다가 매운맛을 본 적이 있었다. 24시간 돌아가는 코인보다야, 여닫는 시간이 정해진 주식이 낫지 않을까. 망설임과 호기로움이 두려움 속에서 왔다 갔다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 머릿속에서 이사 고민이 말끔히 사라졌었다. 어차피 인생의 본질은 나아가는 것. 눈 딱 감고 한 번만 시도해 볼까. 그런데 그럴 돈이 있어야 말이지.


아버님, 그런데 저희가.. 시드머니가 딱히 없어요. 전세자금 대출 갚는다고요.
그래? 너희 집 계약 언제 끝나니?
음... 석 달 정도 뒤요.
그래? 잘됐네.
주인한테 월세로 바꾼다고 한번 얘기해 봐라.
전세금 돌려받으면 그걸로 투자하면 되니까.
알았지?
아... 네. 한번 물어볼게요.


결국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랫집과의 지리멸렬한 다툼 끝에 드디어 이사 갈 마음을 먹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더 이상 아주머니의 소음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지만, 전세금으로 재산을 불릴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요즘 같은 시대에 집주인이 월세 제안을 마다할 리 없었다. 물론 다른 월셋집을 찾아 이사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사 비용마저 작은 시드로 보였다. 각종 전자기기의 재설치와 짐 포장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왜 이사를 나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억울했다. 내가 물러나면 아랫집이 승리의 쾌재를 부르지 않겠는가.


단 한 번, 시부모님을 이 집에 모신 적이 있었다. 담소를 나누고 모두 자러 가서 집 안의 불이 꺼졌을 때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아랫집 남편이 찾아왔다. 차라리 소리가 날 때 올라오지, 왜 이 야밤에야 올라왔을까. 아내가 막대기로 천장을 쿵쿵 치려는 걸 애써 말렸다는 그의 얼굴에 피로가 묻어났다. 진상을 알 길 없는 내 눈앞도 캄캄해졌다. '그저 바닥에 앉아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그것조차 용납이 안 되는 건가.'하고 한숨지었다.


누구보다 조용한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어떤 가족이 이사를 와도 우리 집보다 조용할 리 없었다. 문득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진짜 시끄러운 가족이 이 집에 이사를 온다면 그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세 명의 영유아기 자녀를 거느린 애국자 집안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상상을 했다. 새벽녘 울음소리, 쿵쿵 울리는 발망치, 바닥을 구르는 장난감 소리. 그때야말로 아랫집은 진정한 소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 아주머니의 절규가 들리는 듯해 피식, 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후회하는 아랫집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꽤나 즐거웠다. 하지만 이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되는 데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했다. 내가 이사를 가는 것. 하지만, 망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돈을 지불할 생각은 없었다. 모든 일이 얽히고설킨 채로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결국 정답은 이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집을 고른 게 아니라, 이 집에서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이사가 답이 아니라면, 지금 여기서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야 했다. 통화를 마친 휴대전화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양말을 챙겨 신은 발바닥이 거실을 쓸었다. 여전히 우리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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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L: 밀리의 서재 "아랫집에 미친 여자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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