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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쓸모

<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 당선작

by 유영해

*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가 궁금하시다면?

*창작 지원금 100만 원에 도전하고 싶으시다면?

*어떤 이야기가 당선됐는지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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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L: https://millie.page.link/DAUs9




차에서 바닷물 냄새가 났다. 신경 써서 고른 방향제였는데 문을 열 때마다 움찔했다. 짙은 초록색 병에 나무 막대를 꼽을 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 포레스트 우드향이 깜빡이 없이 끼어드는 차를 향한 분노를 식혀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숲 내음 대신 해풍에 젖은 이끼 냄새만 짙어졌다. 투 플러스 투 상품이라 여분이 세 개나 남았다. 원 플러스 원으로 살 걸.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을 걸었다. 전기차 특유의 떨림이 점잖았다. 내비게이션에 도서관을 입력하고 음악 앱을 켰다. 자동차는 이동식 노래방을 겸하고 있었다. 목록에 떠 있는 제목 중에 하나를 터치하고 액셀을 밟았다. 익숙한 리듬을 흥얼거리며 코너를 돌았다. 매끄러운 손놀림이었다. 근거 없는 자부심은 오랜 세월을 뚜벅이로 살아온 반동이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수석 드라이버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 이 길이 아닌데. 떨어진 자신감에 차석으로 밀려났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대로는 지각이었다. 초행길은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다행히 나가는 차가 있어 매끄럽게 주차했다. 잰걸음으로 강의실을 찾았다. 새로 신청한 글쓰기 수업이었다. 남편은 집 계약을 체결하고 얼마 안 가 해외로 떠났다. 글을 쓰느라 옆자리를 비우는 아내에게 자주 봉기를 들었다. 돌아오면 진하게 놀아줘야지. 그러려면 지금 열심히 배워둬야 한다. 그런데 첫 단추가 이렇게 헐거워서야.


가까스로 지각은 면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섰다.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둥글게 만든 책상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 걸음으로 빈자리를 확보했다. 단상에 서 계신 선생님은 감수성 풍부한 소녀처럼 보였다. 화면 자료에서부터 준비를 많이 해오신 게 느껴졌다. 수업 운이 좋구나.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의 수강생을 곁눈질했다.


아주머니다.


아랫집 그녀가 대각선에 앉아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왜.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를 알아봤을까.'라는 생각에 발바닥이 뜨거워졌다. 기분 전환일까, 자료 모으기의 일환일까. 강의계획서에 따르면 학생들은 서로가 적은 글을 읽고 감상을 나누어야 했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굳었다. 수업을 취소하지는 않으려나. 차라리 내가 먼저 그만두는 게 나을까.


귓가에 윙윙 잡음이 일었다. 나눠준 교재에 물음표만 그려댔다. 집이 아닌 장소에서 마주하기에는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가능하면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혹시 나를 보고 있나 궁금했다. 요란한 눈동자가 바닥을 쓸었다. 발목까지 오는 검은색 치마에는 자잘한 백합이 그려져 있었다. 오른손잡이였다. 둥글게 만 머리가 단정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이 이지적이었다. 상당한 패션 센스였다.


선생님은 수업에 앞서 필명 짓기를 권하셨다. 다들 잠자코 새로운 이름에 골몰했다. 나 혼자 사선으로 쏠린 신경을 거둬들이려 허우적댔다. 산소가 부족한 교실에 뽀글뽀글 물소리가 났다. 여기서 헤엄칠 수 있을까. 허리에 낀 튜브 대신 연필을 꼭 쥐었다.


발표 시간이 되자 맞은편부터 돌아가며 이름을 공유했다. 소개가 끝날 때마다 어색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 상대의 순번이 가까워지자 오므린 주먹 속에 땀이 들어찼다. 단전 깊은 곳으로부터 숨을 끌어올려 길게 내쉬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글귀와 함께 떠오른 건, 아주머니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그녀를 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또 다른 기회였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필명 아래에서는 쉽게 흘러나올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작문으로 발발하는 2차 대전의 시작이다. 어느 쪽이든 각오를 다졌다. 아래를 향한 귓바퀴가 공기 중의 목소리를 수집했다.


안녕하세요. 루미나리에입니다.


이런 목소리였나. 아니, 분명 좀 더 고음이었는데.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찬찬히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아주머니보다 젊었다. 조금 더 생생하고, 조금 더 고상하고, 조금 더 아름다웠다. 스스로 빛을 내는 그분은 아랫집 아주머니가 아니었다.


긴장이 쑥 하고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루미나리에 님의 옆모습은 아랫집 그녀를 쏙 빼닮아있었다. 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박수를 치는 손뼉에 힘이 빠졌다. 실망한 자신의 모습에 행운을 잃은 아이처럼 놀라고 말았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등이 굽었다. 나는 늘 지나간 기회에 아쉬워하는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루미나리에 님은 볼일이 있는지 금세 사라졌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책을 빌려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차가웠던 핸들이 마주한 햇살에 적당히 데워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심호흡하고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재계약 이후로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올라온 적은 없다. 이제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여전히 내 수면 양말은 롤러장처럼 바닥을 쓸고 다닌다. 아들에게는 늘 조심히 걷기를 당부한다. 잘못해서 휴대전화라도 바닥에 떨어뜨리면 압정을 밟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린다. 그녀는 언제든 올라올 수 있고 언제든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를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중얼거린다. 활자를 통해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만약 그녀가 다시 찾아온다면 꽉 차버린 이 이야기의 2부를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예민함 뒤에 감춰진 사연을 풀어가며 예상치 못한 우정을 쌓아도 좋겠지. 소음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아파트를 함께 순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글은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치유계 에세이로 장르를 바꾼다. 제목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윗집에 다정한 이웃이 산다.'로.


인생은 끊임없는 퇴고 과정이다. 읽어도 읽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보인다. 발가벗고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대면을 피하고 싶기도 하다. 눈이 마주치면 여기저기 튀어나온 군살을 쳐내야 한다. 그러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상황에 매몰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글은 없다. 고칠수록 나아지는 원고처럼 우리의 생애도 마찬가지 아닐까. 선택과 의지에 따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을 창조한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질 만한 그런 글귀 말이다. 그 문장 하나가 어제를 다독이고, 오늘을 채우며, 내일을 꿈꾸게 것이다.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쓰듯 삶을 고친다. 머리를 짜내며 타자를 내리치고, 산책을 위해 신발끈을 동여맨다. 요행을 꿈꾸며 꿈속 단어를 남기기도 하고, 책 속 저자의 지혜를 빌리기도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 내 주위 모든 것은 살아있는 글감이다. 거무칙칙했던 과거의 순간조차 버릴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그러니 이것이 이웃의 쓸모이자 나의 쓸모가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의 기억이 되어 비로소 인간사는 깊어진다. 지나간 모든 인연은 결국 내 이야기의 한 문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유영해입니다.


놀 유, 헤엄칠 영, 바다 해. 나는 언제나 바다였다. 푸른 산도 들도 아닌 넓디넓은 바다. 자신의 진짜 이름에서도, 필명에서도 소금 냄새가 났다. 운전자석에 누운 나는 한 줄기의 미역이었다. 물결 속에서 고개를 빳빳이 든 해조류는 없다. 파도에 몸을 맡기면 주위에 떠오른 모래조차 반짝이는 풍경이 된다. 흙탕물이 가라앉은 뒤, 떠오른 햇살 아래 윤기 나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 어떤 소음에도, 어떤 풍랑에도 부드럽게 살아남겠다. 깊고 진한 국물을 남기며 오늘도 나의 바다를 헤엄친다. 충분히 아름답다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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