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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축에세이 일렁 Oct 21. 2024

종교적 팔림프세스트

EP05,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윤승현+보이드아키텍트+레스건축

[Prologue]

대상지는 조선의 '서소문 밖 네거리'라 불리는 교통 중심지였다. 이러한 특성으로 처형장이 자리하게 되었고,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형을 당하는 천주교 박해의 아픈 역사를 지닌 땅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급속한 도시 개발의 부산물들을 수용해야 하는 기능적인 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하 4개 층의 공영주차장과 쓰레기처리장이 그것이었다. 이를 문제로 보고 땅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다.

©2022. illeong All rights reserved.


[Episode]

[진입광장]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여느 종교건물과 달리 높은 첨탑이나 거대한 몸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종교의 권력이 아닌 순교자에 대한 겸허함을 묻어두었다.

방문객은 경사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며 순례의 길을 거니는 시나리오를 따른다. 공간들이 지하에 숨어있을뿐더러 아래 사진처럼 벽돌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내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저 벽돌들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아래로 깊숙이 들어가야 알 수 있다.

박물관 진입광장으로 향하는 경로는 세 가지가 있다. 모두 지붕을 가진 통로를 지나기 때문에 어둠으로 조이고 빛으로 여는 대비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진입광장


[†]

로비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그리드로 구획되어 있다. 과거 공영주차장의 7.5m x 8m 모듈을 이용한 십자 모양의 기둥과 보를 뚫고 지나가는 철골 구조물, 천장의 마감까지 모두 그리드 체계에 놓여있다. 기둥의 십자 모양이 가진 방향성 때문에 네 기둥으로 구획된 공간이 독립적인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십자 기둥의 측면에는 세로로 긴 홈이 페어 있는데 여기에 유리를 끼워 공간을 분할하거나 유리 난간을 설치한 것들도 있었다.


[∩, 콘솔레이션홀]

지하 1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검은색 매스가 천장에 매달려있다. 그리고 지하 3층으로 가는 경사로가 이를 둘러싸고 있다. 검은 상자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는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봐야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건물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하 3층에 도달하여 검은색 벽체 아래의 틈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내부에는 제단 같은 것이 있고 벽화를 담은 미디어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지상에서부터 이곳을 관통하는 빛줄기가 강렬하게 떨어진다. 이곳은 'Consolation Hall'이라 불리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공간이다. 5인의 순교자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 하늘광장]

콘솔레이션 홀 맞은편 외부 공간에는 '하늘광장'이 있다. 조형물을 제외하면 바닥과 벽까지 모두 적벽돌로 둘러싸인 공간이다. 그 스케일이 거대하고, 푸른색과 붉은색의 명확한 경계를 넘어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벽돌 천장이 길게 뻗어있어서 하늘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하늘을 마주하게 되는 공간 연출을 가지고 있다.

콘솔레이션 홀과 하늘광장은 서로 거꾸로 뒤집힌 형태이다. 이 둘은 암과 명의 대비를 이룬다. 전자는 벽체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후자는 바닥에서 솟는다. 콘솔레이션 홀이 순교자의 무덤이라면 하늘광장은 천국의 문이다. 콘솔레이션 홀을 감싸는 경사로는 퇴적된 역사를 마주하는 여정이고, 하늘광장을 감싸는 경사로(하늘길)는 마무리의 여정이다.

하늘광장 / 하늘길


[Epilogue]

땅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층 속에 묻히고 희미해진다. 존재하지만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 중에 가치 있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품는 것이 박물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이러한 역할에 공공적 성격까지 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 1946~)의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박물관의 신관을 구축함으로써 기존의 컨텍스트에서 드러나지 못한 유대인들의 고통과 비극을 드러낸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또한 존재하지만 사라진 듯한 천주교 박해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하공간과 빛이 떨어지는 보이드의 신령스러움이 설득력을 높이는 것 같다.

유대인 박물관


[이미지 출처]

유대인 박물관

https://libeskind.com/work/jewish-museum-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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