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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J Oct 08. 2024

광고이야기 5.

감춰진 사용설명서

미안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시키는 것을 '부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시키는 일은 ‘용역’이라 한다.

회사는 내게 값을 지불하고, 나는 회사에 용역을 제공한다.

내 직접적인 고용주는 회사다. 내 옆자리의 고용주도 마찬가지다.

고용되면 회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에 필요한 곳, 팀이라는 울타리 안에 사람들을 모아놓는다.

팀 역시 회사를 위해 존재하며, 팀의 고용주도 여전히 회사다.


그러나 그 팀 안에서도 일을 시키는 사람과 용역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

선임과 후임의 관계가 그렇다.

더 경험이 많은 선임이 일을 시키고, 상대적으로 적은 후임 이를 따르게 된다.


이 관계에서 제공되는 용역에 추가로 지불되는 값은 없다.

쉽게 말해, 서로 간의 금전적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키는 선임은 미안함이 없고, 일을 받는 후임도 거부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경력 차이에서 오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임의 요구는 부탁이 아닌 지시다.


그러나 후임이 선임에게 제공하는 용역이

선임이 회사에 제공하는 용역보다 시간, 정성, 노력 면에서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그 가치가 회사에 온전히 전달되는 과정은 당연하지 않다.

선임이 자신의 용역에 후임의 노력을 병합해 버리면, 후임의 모든 용역은 쉽게 사라져 버린다.

이는 선임이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후임의 노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흔한 상황이다.

내가 후임 때 회사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부당함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값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무가 생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는 속담이 어느 때보다 와닿았다.


지금, 수년이 지나 팀장이 된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사람을 부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정확히는 사람을 부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가 진짜 어렵다.

사람을 부리기 위해서는 인간관계, 논리적인 화법, 공감 등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돈을 주지 않는 내 지시를 잘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팀장이 모든 일을 다 해가며 팀을 이끌 수도 없다.

팀원들도 팀장의 지시 없이 일을 해내기란 쉽지 않다.


사람을 잘 부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야 가능해진다.

내가 경험했던 팀장들은 대부분 팀원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본인이 원하는 걸 이야기하고, 그대로 해주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원하는 걸 요구할 때는 각 팀원의 능력에 맞는 디테일한 지시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팀원들의 능력 파악이 우선이다

“이 친구는 꼼꼼하고, 저 친구는 기발하며, 또 다른 친구는 논리적이다”라는 식의 파악 없이,

용역만 제공받으려 하면, 수행의 완성도가 경력에 따라 달라진다.

경력이 적은 순으로 도태되고 무시받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팀이 될 뿐이다.

일하는 사람만 일한다는 팀의 특징이다.


경력과 상관없이 체질상 하지 못하는 일 도 있다.

내 경우 오글거리는 카피 작성은 쥐약이었다.

내 경력과 상관없이 내 체질상 도저히 디벨롭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 후임 중에 오글거림이 체질인 친구가 있었음에도 경력을 이유로 내가 완성하길 지시했다.

결국 내가 후임의 카피를 디벨롭해 완성했지만, 개인적으로 참 고생한 부분이다.

만약 팀장이 내 특성과 후임의 특성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후임에게 기회가 더 주어지고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사람에겐 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일종의 사용 설명서가 있다.

하지만 그 사용설명서를 선뜻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들여다보는 데는 여러 노력이 필요하다. 대화가 그중 가장 쉬운 방법이다

설명서의 취급 시 주의 사항이나 기능을 설명하는 상세 페이지를 잘 들여다보았을 때,

비로소 꽁꽁 숨겨두었던 그들의 이기심을 확인할 수 있다.


각자의 이기심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사람을 잘 부리는 능력이 결정된다.

서로의 이기심을 충족할 수 있을 때 원만한 거래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물건을 들일 때 그 장단점과 필요성을 꼼꼼히 따져보듯이,

사람도 필요에 맞게 꼼꼼히 따져 들였으면 좋겠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임의로 결정, 선별해 배정된다.


마치 갖고 싶은 선물을 이야기했지만,

포장을 풀었을 때 내가 원했던 정확한 선물은 아닐 때처럼,

선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 그리고 선물조차 어색해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선물로 받게 된 제품에도 사용 설명서는 있다.

내가 산 제품이 아니니 대충 사용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선물을 어떻게 잘 써볼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용 설명서를 읽고 또 읽다 보면 보일 것이다. 그들의 이기심이.


결국, 사람을 제대로 부리는 법은 서로의 이기심을 이해하는 데 있다.

그 이기심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부리는 사람도, 부림을 받는 사람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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