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극복기-과거
어렸을 때 세상은 내게 너무 많은 자극들로 가득 차서 소화하기 힘든 곳이었다.
지금은 무뎌지는 방법을 찾아서 이전과 같은 경험을 하진 않는다.
어린 내게 감각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었다.
너무도 살아있어서 내게 고통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오각, 즉, 미각, 촉각, 시각, 청각, 후각 모두 날카롭게 나를 찔러대는 탓에 밤에는 늘 불면증을 달고 살았다.
처리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이 남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빙빙 돌았기 때문이다.
하수구에 막힌 머리카락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막힌 물과 함께 울컥거리며 회오리 치듯,
내 생각은 언제나 내 머릿속에서 그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영상을 보면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후면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애니메이션은 내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우울하고 불안을 가져다줬다.
표면으로 보이는 밝은 색감과 미소는 내가 보는 어두운 필터에 갇혔고, 발랄한 노래와 움직임은 고장 난 태엽처럼 느리게 재생되었다.
놀랍게도 그렇게 느꼈던 애니메이션은 배후엔 좋지 않은 제작 과정과 스토리가 있단 걸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나의 우울증 때문에 그렇게 느낀 건지 hsp의 민감한 감각으로 알아차린 건지 모르겠다.
밖에 나가면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재미와 흥미로 가득 찼고,
모든 걸 하나하나 뜯어보거나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흔들리면 흔들리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안녕 안녕 안녕...
나뭇잎들이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안녕 안녕 안녕...
나도 속으로 인사를 했다.
보고 또 보았던 것들도 항상 흐르고 있어서인지
자연만큼은 질리지가 않았다.
쨍한 푸른 하늘, 금빛으로 내리쬐는 햇살, 그 빛에 물든 사물들은 모두 따뜻하고, 빛나고, 포근해 보였다.
누구보다 낭만 있고, 누구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었던 나이였다.
하지만 이런 감각에는 단점도 있는 법이다.
타인이 던진 한마디는 내 무의식 속에 박혀 끊임없이 맴돌았고, 나에게 맞지 않는 음식은 너무나도 많아서,
소화를 하지 못해서, 언제나 저체중이었다.
까맣고 빼빼 말랐던 나는 이따금 지나가는 타인의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침을 먹지 않으면 학교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엄마의 말에 신물이 올라오는 속에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고
눈물을 흘리며 불안한 마음으로 떠나가는 버스를 뒤쫓아갔다.
엄마는 너 때문에 버스를 놓치지 않았냐며
너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죽겠다며 나를 타박했다.
학교에 도착하면 나는 토를 했다.
그래도 내가 먹지 못하는 음식들은 꾸준히 내 앞에 놓였고, 가족들은 그것을 즐겼고,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먹지 않으면 혼이 나야 했다.
집에서 들리는 깨질듯한 설거지 소리,
밤만 되면 들리는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
물건이 던져지고 부서지는 소리,
살려달라는 외침과 내가 할 수 있는 한 돕던 나.
나에게도 직접적인 폭력과 폭언이 매일 이뤄졌다
크고 나서도 한동안 큰 소리가 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얼어있곤 했다.
그런 내게 너는 왜 이렇게 예민하냐며 가족은 나를 탓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숨죽여,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을 때에만 그제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것만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참을 수 없는 시끄러움에,
소화할 수 없는 음식에,
나의 의견 반영은 되지 않는 갑갑한 옷에,
집에 들어서면 진동하던 술 냄새,
언제 들릴지 모르는 괴성과 폭력.
이런 집안의 모든 문제는 예민한 나의 탓이 되었다.
네가 예민해서 별것도 아닌 걸 별 걸로 받아들이는 거고, 예민해서 큰소리에 놀라는 거고, 예민해서 폭력에 놀라는 거라고.
당연히도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은 가치 없는 것들이었고
들어줘야 할 하등 이유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본적인 것도 지켜지지 않지만,
어렸던 나는 내가 원하는 걸 한 번은 들어줄 거란 희망 고문에, 약속에, 몇 번이고 들떴다가, 그리곤 결국 절망과 배신에 치욕감을 느끼는 걸 반복하며 지쳐갔다.
그렇지만 그들의 모든 행동의 이유는 내가 잘못해서였고, 어떤 것이든 내가 한 행동이 그들이 한 행동의 대항인 건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민한 나를 예민한 상황의 극한까지 몰아넣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못하고
아무것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게 만들고서야
그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했다
나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됐다.
나는 원하는 게 없어졌다
나는 느끼는 게 없어졌다
나는 즐거운 것도
슬픈 것도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의 표정은 무미건조해져 갔다
나의 행동이 어떤 게 맞는 건지
고장 난 기계처럼, 단순한 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면 즐겁게 지켜보며 그들은 비웃었다
그거 하나 선택 못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살아갈 거야?
정말 답답한 인생이야
넌 정말 한심한 인간이야.
어떤 선택도 내가 하는 선택은 옳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단어를 내뱉어야 맞는 말인지 모르겠어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어색해졌다.
그런 나를 괴롭히고 놀리기 좋은 타깃으로 노리고 온
사이코패스 같은 인간들도 여러 번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점점 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느끼지 못하고
살아있고 싶지 않고
모든 것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죽음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
잘못 디디면 떨어지는 낭떠러지에
홀로 서서 그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고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흔히 있을 법한
단 한 명의 구원자
현실 속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곰팡이 핀 음식과 쓰레기가 쌓인 방안에
홀로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미성년자여서 부모가 돌볼 의무가 있지만
그들에게 중요하진 않았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에도 더한 짓을 한 인간들이니
그런 건 내게도 별것도 아니었다
방바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놓여있었고
책상 서랍에는
그들이 내뱉는 끔찍한 말들이,
웃으며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나에 대한 끔찍한 모욕들이,
더 이상 참기 힘들 정도일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수치심과 절망과 불행과 괴로움에 몸부림칠 때,
그때를 위한 작은 칼이 놓여있었다.
칼 종류는 상관없었다
없으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과호흡이 와서 숨을 쉬기가 어려워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문방구에 가서 칼을 사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나의 뇌 일부에 침투해 있다가
무방비할 때 튀어나와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나를 해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것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제정신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나의 인생은 지나갔다
이게 나의 인생의 전부였다
다른 사람들과 나는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 달랐다
나도 그들을
그들도 나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말이 아닌
분위기와 느낌만으로도
우린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서로가 알 수 있었다
내 주위엔 이상한 사람들이 잘 꼬였다
내 분위기를 읽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도 같지 않았다
그들은 그 뿌리 밑에 악한 심성이 깃든 사람이 많았다.
내게 그런 것들을 늘어놔도
내가 이해할 리가 없었다.
나는 황급히 그들을 멀리했다
그래도 이제는 나는 전보다 성장했다.
이제는 먹고 싶은 것도 생겼고, 하고 싶은 것도 생겼다.
그나마 하나씩 찾아가고 있다.
여전히 그 무의미함 속에서 몸부림치지만
끊임없이 투항하며,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런 나의 투항의 과정을 아주 세밀하고, 또 아무런 숨김없이 작성한 글이다.
기록이자, 치료이며,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글이다.
모든 다정한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