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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라는 갑옷: 과거의 '나'와 화해하기_2

내가 냉소주의(cynicism) 에 빠지게 된 건에 대하여

by cogito
난 할 수 없을거야.
실패할 게 뻔해.
모든 사람은 믿어서는 안돼.


새로운 도전이나 사람을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말들을 되뇌었다.

마음 속에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눈에 띄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지만,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대사들이 무한 재생되며 그 불씨를 꺼뜨렸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은 없을거라는 '무적'의 논리에 기대어,

나는 스스로에 기대를 포기하고, 주변 사람과 세상을 향한 헛된 기대도 품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정말 나를 보호해줬을까?

기대와 도전에서 도망치면 칠수록 내 세상은 점점 협소해졌고, 한때 다채로웠던 일상은 점차 피폐해졌다.


모든 것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는, 비관적인 사람.

- 이러한 사람을 흔히 '냉소주의자'라 부른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냉소주의(Cynicism)는 타인과 세상을 '불신'하는 태도(주1)로 정의된다;

냉소주의자는 얼핏 보면, 냉철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 쉽게 현혹되지 않으며, 헛된 희망에 휘둘리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냉소'는 마음을 점차 부식시킨다;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며, 새로운 기회마저 외면하다 보면 결국은 정체된 사람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고인 물이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가듯, 냉소주의에 의해 빚어지는 세계는 점점 고립되고 어두워진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일까?


냉소주의는 때때로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갑옷'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단단한 갑옷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 공격받을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으니까,

기꺼이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경우, '실패''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냉소'라는 무기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유독 예민한 기질을 타고 난 나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타격을 입었다 - 특히,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며,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과장된 행동을 하기도 했다 - 항상 들떠있는 사람인듯 '연기'를 하면, 사람들이 나를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봐줄거라 기대하면서.


- 하지만 그런 모습이 어색하고 불편했던 친구들은, 내게 '나댄다', '재수 없다'는, 경고 비슷한 조언을 해주었다. 좋게 보이려던 행동이 되레 역효과를 낳자, 나는 (어리석게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 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친구를 사귀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냉소주의는, 입시 실패를 겪으면서 더욱 깊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나는, 사립 중학교에 합격하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능력'은 '부족한 사회성' 이라는 단점을 메워줄거라 믿었고, 친구 관계를 포기하기로 한 후 더욱 그 목표에 메달렸다.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준비하며 노력한 결과, 운좋게 1차 시험은 통과했다.

하지만 후반에 너무 긴장한 탓이었을까 - 허무하게도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합격'의 타이틀을 거두지 못한 나는, 심한 자기 회의에 빠졌고, '탈락자'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다닐 것만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


"고등학교, 대학교, 취업에서도 계속 실패하면 어떡하지?"
"사회성이 부족한 내가, 능력마저 없으면 어떻게 살아남지?"


이런 생각들은 점점 커졌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마치 나를 질식시킬 것처럼 옥죄었다;


결국 나는 새로운 도전을 피하기로 마음 먹었다;

'냉소'와 '비관주의'라는 갑옷을 두른 채,

새로운 기회가 와도 외면하고, 목소리를 내야 할 순간에도 침묵하며, 다가오는 인연조차 스스로 밀어냈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게 낫지.
비난받느니 차라리 가만히, 혼자 있는게 안전해.


- 이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세상과의 연결을 하나 둘씩 차단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솔직히 마음이 편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할 일도 없고, 희망을 버리면 좌절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현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공허함이 밀려왔다;

나를 좋게 봐주던 사람들도 연이은 거절에 지쳐 떠나갔고,

도전을 회피하는 동안 성장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학생이란 본분 때문에 계속하던 공부도, 이제는 미래의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결국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발전하지 않는 나 자신이,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화석'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가고 싶다


- 웅크린 채 살아가는 것에 지쳐, 변화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움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년째 몸에 밴 냉소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던 나에게, 어느날 새로운 대안이 찾아왔다;






냉소주의(cynicism) vs 회의주의 (skepticism)


냉소주의에 대한 온갖 문헌와 팟캐스트를 탐독하던 중,

'자밀 자키 (Dr. Jamil Zaki) 라는 심리학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자키 교수는 '희망적인 회의주의자 (hopeful skeptic)'라는 개념을 제시한 인물이다;

여기서 '회의주의(skepticism)'는 흔히 '냉소주의'와 혼동될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냉소주의는 무조건적인 '부정(denial)'과 '거부'를 특징으로 하는 반면, 회의주의는 새로운 정보를 의심하되, 긍정의 여지를 남겨두는 태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심리학 서적에서는 이 차이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2);


"A skeptic is a doubter, a cynic is a disbeliever. (회의주의자는 의심을 하며 질문하는 사람이지만, 냉소주의자는 모든 것을 불신하는 사람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자밀 자키 (Jamil Zaki) 교수님의 웹사이트




자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냉소주의는 사람의 심리적 회복력을 저하시키며, 무기력과 고립을 초래한다; 냉소주의에서 비롯된 비관적 사고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는 '족쇄'가 되는 것이다.

반면, 회의주의는 세상을 더 명철(明哲)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우며, 무분별한 정보를 걸러내는 '거름망'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도 '희망을 품은 회의주의'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변화와 성장을 향한 열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 즉, 희망적 회의주의자는 비판적으로 사고하면서도, 자신과 타인에 대해 '희망'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희망이 있기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타인에게 희망을 가지기에 세상과 관계맺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고, 누구나 부족함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딛고 일어서며, 부족함을 채워나가려는 태도이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 단정 지으며, '나아질 수 있는 희망'을 스스로 뿌리쳐 왔던 것 아닐까.


실패와 상처에 연거푸 무너졌던 나는,

이제 냉소주의를 벗어나 '희망적인 회의주의자'가 되려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여기서 경험하는 실패와 한계를 모두 받아들이는 용기.

상처를 경험하더라도, 자존감을 지켜내는 단단한 마음.


이 모든 것을 갖춰나가기 위한 방법론을, 향후의 글에서 찬찬히 정리해 보려 한다.

-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


상처입은 사람들.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들.

모두 다 화이팅이다!



번외) 작년, 내가 자키 교수님의 팟캐스트를 듣고 남긴 블로그 포스트이다:

https://blog.naver.com/hafin0330/223576718976



주1: 영어 원문 : Cynicism is a distrust of others and a refusal to believe.
물론 전문가마다 구체적인 정의는 다르지만, 냉소주의가 '불신'과 '인간/문명에 대한 거부'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https://behavioralscientist.org/instead-of-being-cynical-try-becoming-skeptical/#:~:text=Cynicism%20and%20skepticism%20are%20often,about%20who%20they%20can%20trust.


주2: Columbis journalism review 의 기사 중
"How is skepticism different than cynicism? Find the answer in ancient Greece"

October 15, 2018 By Merrill Perlman

https://www.cjr.org/language_corner/skepticism-cynicism.php#:~:text=The%20adjective%20%E2%80%9Cjaded%E2%80%9D%20first%20appeared,are%20for%20others%20to%20w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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