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과거, 그리고 현실을 살아갈 용기
영화 '인셉션(2010)'을 본 후, 문득 책에서 읽은 문장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현실을 외면하는 건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는다고 해서, 시간이 널 위해 멈춰주진 않아.'
(Only a coward closes his eyes. Closing your eyes and plugging up your ears won't make time stand still.)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서 등장한 구절이다.
이 말처럼, 우리는 현실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질 수 있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지금의 현실을 빚어낸,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도 미련을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때때로 현실은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무거울 때가 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가끔은 현실에 의해 가혹하게 무너지며,
후회스러운 과거에 얽매이기도 한다.
이런 힘든 순간들에, '꿈'으로 도피할 수 있다면 어떨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셉션 (2010)'은 '꿈'이라는 소재를 매우 신선한 방식으로 연출한다.
(이 영화에는, 내가 다루고 싶은 수많은 주제들이 녹아있지만...)
오늘은 '인셉션'의 주인공, '코브(Cobb)'의 심리를 중심으로
괴로운 현실을 직면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의 주인공 코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도둑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의 꿈속으로 침입하여 기밀 정보를 훔치고, 그들의 기억까지 조작할 수 있는 '꿈 기술자'이다.
한때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던 그는, 사랑하는 아내, '멜 (Mal)'과의 사별 이후 깊은 트라우마에 빠진다.
멜은 코브의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는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남긴다.
아내를 잃은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코브는 꿈속에서 그녀의 환영을 만들어 내고, 어떻게든 사라진 아내를 붙잡기 위해, 점점 '꿈'에 의존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아내의 죽음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꿈속에서 스스로를 과거의 '감옥'에 가둔다; 아내의 죽음을 멈추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에, 괴로운 기억들을 끊임없이 재생하며 스스로를 벌하는 것이다.
위 사진 속 장면에서, 코브(우측)의 꿈을 본, 한 캐릭터(좌측)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어떻게든 아내와 함께하기 위해 계속 꿈을 꾸는 거죠?
당신은 그녀를 떠나보내기 싫은 거군요.'
(You're trying to keep her alive.
You can't let her go.)
이러한 그의 상황을 빗대어, 영화에선 '기억의 감옥(prison of memories)'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소중한 사람과 함께했던 과거에 갇힌 채,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허구적 설정일지 모르나, 영화 속 코브의 행동은 실제 '트라우마' 환자들의 반응과 유사하다.
트라우마 환자들은 계속 과거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현실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잃어버린다. 과거가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을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여기서 '사별'의 경험 또한 강한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사별 이후 비정상 애도(prolonged grief)를 겪는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난 이와의 관계를 지속하려 한다. - 이러한 과정은 망상 또는 반복적인 회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이로 인해 현실과의 연결이 단절될 수도 있다.
- 코브가 꿈속에서 멜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모습 역시, 이러한 심리적 과정과 닮아 있다.
여기에 '죄책감(guilt)'이라는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애도의 과정은 더욱 길어지고, 그 강도 역시 높아진다;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위와 같은 생각이 반복되면서,
과거의 자신을 채찍질하고,
현재의 삶이 멈춰버리는 것이다.
코브 역시 자신이 멜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이는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다행히, 영화의 결말 속에서 코브는 아내가 없는 현실을 다시 마주할 결심을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멜의 환영과 대면하며, 그녀가 더 이상 현실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는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고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순간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코브는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꿈속에 있는지, 현실에 있는지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별첨);
그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허상 속의 아내 대신, 현실 속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 곁에 남기로 선택한 것이다.
(난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현재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과거의 인연을 '배신'하는 것은 아님을 깨닫고 간다 -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과거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만 갇혀 현재를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줄 수 있다.
옛 인연들에 얽매여, 지금 눈 앞의 인연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영화 '인셉션'은 단순한 SF 영화를 넘어서, 인간의 심리와 애도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현실을 피하려 할 때,
과거에 갇힐 때,
그리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때...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가장 깊은 감옥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용서(forgiveness)' 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실수를 용서할 때, 비로소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니까.
과거와 화해하고,
현실을 직면할 용기
- 그것이야말로 영화 속 코브가 얻어낸, 진정한 '각성'(awakening)이 아닐까.
영화의 시작에서 '코브'는 '팽이'라는 물건에 집착한다;
이 팽이는 지금의 자신이 '꿈' 속에 있는지, '현실'에 있는지 분간해 주는 감별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브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동안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 팽이를 뒤로 하고,
아이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있는 힘껏 끌어안는다;
이는 그가 '꿈'과 '현실'에 대한 혼란에서 벗어나, 이제야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를 포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나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려 보았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페이지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