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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정 Oct 04. 2024

엄마

질투쟁이 우리 엄마

내겐 질투쟁이  친정엄마가 있다.

올해로  70살이 되신, 5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가슴속 꼭꼭 숨어 있는 우리 엄마 순자 씨.....


나는 하루에 꼭 두 번은 순자 씨에게 안부전화를 한다.

출근길 아들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잠을 깨고자 매일 들리는 카페에서 카페라테를 한잔 사들고,

다시 차에 타고나면 9시.

그 시간 나는 엄마에게 어김없이 전화를 건다.


"엄마 잘 잤어? 아침은 먹었어?"


"응 우리 딸 커피 샀어? 영재는 내려주고? 별일 없지?"


아침마다 늘 똑같은 인사로 출근길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퇴근시간은 저녁 8시.

퇴근과 함께 시작된 똑같은 저녁인사 레퍼토리가 이어진다.


"오늘 바빴니? 힘들었지? 밥은 먹었어?"


"응 오늘 바빴어. 배고파 집에 빨리 가야지"


나의 하루 중 시간 맞춰 일정을 챙기는 일은 엄마에게 전화 걸기다!

안 그러면 엄마는 내게 늘 화를 내기 때문이다.




나는 주 5일 근무이긴 하지만 남들처럼 주말이나 공휴일에 쉬지는 못하고 평일 정해진 요일에 이틀을 쉰다.

그래서 내가 일을 시작하고는 가족이 다 같이 시간을 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어제는 진짜 오랜만에 내 쉬는 날이 달력의 빨간 날이랑 겹쳤다.

늘 밤늦게 퇴근하고 집에 오는 엄마로서,

11살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달고 사는 나에게

아들과 오랜만에 시간을 함께 보내줄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다 같이 보낼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날 나는 가족과 가평에 있는 수목원에 바람을 쐬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세운 계획은 이랬다.

늦어도 아침 7시에 출발하고 집에서 목적지까지 대략 1시간 30분 거리니까

여유롭게 8시 30분쯤 도착한다.

기회를 봐서 오전 9시가 되면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엄마에게 집에 있는 척 전화를 한다.

집에 있는 척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끼리 수목원에 간 사실을 알면 그것마저 엄마는 삐질 테니깐.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나는 가족과 함께 수목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연휴라 그런지 차가 막히기 시작했고,  결국 9시쯤 도착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엄마에게 빨리 전화를 해야 하는데.....

엄마가 기다리다 못해 또 화를 내고 욕을 할 텐데.....

얼른 조용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나와 오랜만의 외출에 신난 막내아들은 조잘조잘 들뜬 마음으로 내 팔에 매달려 나를 이리저리 끌고 갔다.


나도 오랜만에 상쾌한 수목원의 공기에 취해 아들에게 이끌려 엄마를 잠시 잊고 말았다.

그렇게 남편과 아들이랑 사진도 찍고 산책을 하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내 전화는 기다리기만 하지 먼저 전화를 잘하지 않는다.

그냥 기다리고 기다리고

'요년 봐라~~ '하면서 언제 하는지 끝까지 기다린다.

늦으면 늦을수록 요년에서 시작된 년, 년, 년, 년, 은 점점 거칠고  험한 '년'이 되어간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더 늦기 전에 얼른 조용한 장소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엄마~~~"


"지금이 몇 시냐??? "


날카로운 목소리에 성질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다.


"어 쉬는 날이라 피곤해서 좀 늦게 일어났어~~"


"니 새끼들이랑 니 남편이랑 다 같이 있으니까 나는 신경도 안 쓰이지?

너 좋다는 송가 놈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아주 좋은가 보지?

너는 좋겠다? 너 좋아서 절절매는 송 씨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이제야 전화를 해?? 나쁜 년!!!!"


다행이다. 나쁜 년까지 왔을 때 그나마 빨리 전화를 했다.

휴.... 한숨 돌리고 나는 열심히 거짓말을 하며 엄마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교를 떨면서 애를 쓴다.


어젯밤 8시에 통화를 하고 매일 아침 9시에 하는 전화를 고작 30분 늦었을 뿐인데,

내 엄마 순자 씨는 왜 이렇게 나한테 서운하고 화가 났을까?




엄마가 노년이 되고 남편 없이 나하나 바라보고 살게 되니 외로워서 그렇게 된 게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우리 엄마 순자 씨는 내게  늘 그래왔다.

40살의 순자 씨도, 50살의 순자 씨도, 60살의 순자 씨도, 지금 70살의 순자 씨도

늘 나한테 의지하고 나하나만 바라봤고, 어디서 화가 나도 나한테 욕을 하며 본인의 화를 삭이는….

내 엄마 순자 씨는 늘 그랬다.


남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거 아냐?

그런 엄마가 어딨냐?


그런 엄마 여기 있다. 내 엄마 김순자 씨!!

한때 나는 엄마가 친엄마가 아닐 거라는 의심까지 했다.

친자검사를 해봐야 하나 생각한 적도 있다.


우리 엄마를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이 참 많은데 그중에 하나를 또 꺼내 보자면 이렇다.


내가 남편과 재혼하고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을 키우면서

남편과 나사이에도 아이가 있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난임판정을 받고도  남편과 인공수정을 여러 번 시도했고 고생 끝에 남편과 나사이 첫 아이를 낳았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첫 외손주를 낳았다.


우리 가정의 재정상 조리원 2주도 빠듯해서, 산후도우미 이모를 부를 수도 없고

친정엄마 시어머니 두 분 다 나를 도와줄 수 없으셨기 때문에

나는 2주 조리원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내 몸 몸조리하기, 신생아 돌보기, 남편 출근시키기 큰아들 초등학교 입학준비 등등 아직 힘든 몸을 이끌고 힘든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엄마는 나름 딸이 애도 낳았고 손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오신다 했고 , 엄마가 오시면 내 할 일이 또 늘어나게 되는 게 싫어서  극구 오지 말라고 다음에 오라고 말리는데도 강원도 원주에서 내가 사는 수원까지 오셨다.


신생아는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한다는데 우리 아들은 잠을 안 잤다.

밤새 울다가 새벽 5시쯤 겨우 잠들면 1-2시간 잠깐 자고 또 일어나 울고 하루종일 나를 힘들게 했다.


엄마가 오신 날도 그랬다.

밤새 안 자고 보채고 울다가 새벽 5시쯤 잠이 들었다.

나도 아들한테 시달리다 겨우 잠이 들었을 때다.


새벽형 엄마는 4시쯤 일어나 6시엔 꼭 아침식사를 하는 분인데,

내가 깜박 잠든 사이, 엄마 식사 하시라고  불러야 할 내가 아무 소리가 없자 거실에 나와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비몽사몽 밖으로 나왔고, 엄마는 옷을 다 갖춰 입고서는 내게 성질을 내며 말했다.


"야! 찬밥 남은 거 없냐? "


"응? 엄마 왜? 배고파? 아이고 벌써 6시네? 미안해 얼른 밥 할게"


"됐어! 찬밥 있으면 줘봐 그거나 물말아 처먹고 집에 가련다!"

엄마는 자기를 챙겨주지 않아 화가 나서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고 나도 그런 엄마가 미워서 큰소리로 싸우고 있었다.

소란 스런 소리에 남편이 나왔고, 화가 단단히 난 장모님을 애써 풀어드리고 방으로 나를 데려와 위로했다.


"난 살면서 저런 장모님은 처음 봐, 아니 엄마가 미역국은 못해줄 망정 새벽밥 안 해준다고 갓 애 낳은 딸한테 성질을 내면서 이 시간에 집에 간다고 하시다니, 자기 정말 힘들었겠다."


눈물보다는 남편에게 내 엄마가 참 민망하고 창피했다.


콩쥐팥지에 콩지도 아니고,  난 분명 엄마의 하나뿐인 딸임에도  엄마는 내게 늘 이랬다.


야속했고, 엄마가 미웠다.

나는 크면서도 늘 엄마처럼 되지 말아야지,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절대로 엄마처럼 안 할 거야

다짐하고 다짐했다. 딸들은 아이를 낳으면 엄마생각에 눈물이 그렇게 난다는데 나 역시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나긴 했다. 나는 왜 미역국 끓여주며 나를 위해 희생해 주는 엄마가 안 계실까?

아기를 낳아보니 더더 엄마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에 혼자 남은 내 유일한 친정 가족인 엄마를 안 보고 살 수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콩쥐인 듯 아닌 듯 엄마딸로 우리 아이들 엄마로 한해 한해 살아가면서 엄마를 이해해 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가난한 집 막둥이라 언니오빠들에게 치이고,

40 넘어 엄마까지 낳아 살림을 챙기느라 빠듯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도 받지 못했고,

못 배운 서러움도 있었고, 그러다 부모를 일찍 여의었고, 성인이 되어 첫 번째 결혼 후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을 했고, 두 번째 결혼 후 나와 내 친동생을 낳자마자 남편이 죽었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우기 버거워 동생을 입양 보내고 엄마는 나를 홀로 키웠다.

그러다 세 번째 남자를 만나 재혼했는데 그 남편도 얼마 살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으니,

엄마의 마음에 나를 돌봐줄 여유가 있었을까?


오히려 나를 입양 보내지 않고 엄마옆에 두고 나와 살아준 엄마가 고마웠다.

내가 나의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해 가는 동안

엄마의 삶이 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살아온 엄마가 같은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참 가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엄마가 내게 나쁜 년!!

하고 욕을 해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


‘보고 싶어 우리 딸’


하고 말하는 거겠지…


그래서 더 엄마를 서운하게 하지 않으려 했다.

빨간날 혼자 있는 자기가 처량하다 생각하고 있을 엄마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남편이랑 아들이랑 놀러 나왔다 말하지 못하고 늦게 일어난거라고 거짓말을 하며 엄마에게 전화하고 있다는 걸 우리 순자 씨는 알고 있을까?


야속하고 미웠던 엄마가 이제는 화를 내고 성질을 내고 영재를 질투해도 그 마음 깊이 아직 자라지 못한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보여 마음이 아프다.


엄마가 화를 내도 이제는 웃으며 받아주는 여유가 생길 만큼 나도 이제 어른이 되어가고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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