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對馬 방문기
쯔시마 도착 첫날 오후 제일먼저 향한 곳은 최익현 선생 순국비가 있다는 슈젠지(修善寺)였다. 이 절은 353년 백제 귀족출신인 법명 비구니가 창건한 사찰로, 이곳 수선사(しゅぜんじ)에서 장례를 치렀기에 선비정신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에 한일양국 유지들이 함께 순국비를 세웠다고 한다.
수선사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늑약(勒約)의 무효를 선포하고 조약을 체결한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며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 중 1906년 체포되어 [이즈하라]에 유배 중 지급된 음식을 거부하다 아사(餓死)했다 전한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 곧이어 ②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를 찾아보았다. 덕혜옹주는 조선말 고종의 외동딸로 1925년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1931년 대마도 번주의 아들 소다케유키(宗義志)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대마도에서 이를 축하하기 위해 결혼봉축 기념비를 세웠으나 딸이 죽은 뒤 이혼까지 당한 비운에 옹주였다.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이혼 뒤 기념비는 대마도 한 시내구석에 버려지게 되었는데, 1961년 홀로 귀국한 옹주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머물다 1989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당시 훼손된 기념비석은 2001년도에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결혼봉축 기념비에서 조금 올라가면 조선통신사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세워진 조선국통신사비가 있다.
조선국통신사비 오후 투어를 마친 뒤 저녁식사 후 1박 2일 대마도의 밤을 조용히 마감할 수 없어 숙소인근 이자카야를 찾았다. 이즈하라의 밤은 어두운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마저 없어 더욱 한적해 보여 선술집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つしま いざかや 하지만 밝은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조금 걸어가 보니 몇 군데 이지카야가 나타났다. 거리 못지않게 선술집 내부에도 사람들이 없어 큰 고민 없이 안으로 들어 가보니 제일먼저 오뎅과 라멘 문구가 눈에 띠여 주문이 별반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5명 일행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곳을 원했는데, 2006년 방문 시에는 주말여행객이 많지 않았기에 손님들이 없어 아늑하고 소박해 보이는 분위기에서 약주 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당시 정종 8잔에 도리야끼(鳥燒き) 5개 생선야끼 5개, 베이컨야끼 3개에 5,300엔 이었다.
닭꼬치/ 베이컨꼬치 맥주1병이 포함된 노래방은 1시간에 2,100엔으로 쯔시마 섬의 밤은 큰돈을 쓸 일 없이 여흥을 즐길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부산정] 간판 위에 쓰인 김치라면(キムチ ラーメン)도 눈길을 끌었다.
부산정 쯔시마 이튿날 [이즈하라 항]을 떠나 북(北)으로 향해 10시경 ③만제키바시(万關橋)에 이르렀다. 이 다리는 아소우만(灣)과 미우라만(灣) 사이에 개착된 만관뇌호(万關瀨戶)라 불리는 운하에 놓여있는 다리다.
만관뢰호 인공운하 만제키세토 운하는 1900년 일본해군이 아소우만에 있는 군함을 쯔시마 동쪽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당시 [만제키세토 운하]는 폭 25m, 깊이 3m의 규모로 만들었다.
하지만 해양 군사전략상 더 큰 배의 이동을 위해 1975년 폭 40m, 깊이 4.5m로 확장해 건설했고, 쯔시마 섬을 위아래로 나눈 경계로 북부를 가미시마(上島), 남부를 시모시마(下島)라 부른다. 조류의 멋진 소용돌이를 볼 수 있다는 만관교는 빨간색 인공미를 뽐내고 있었다.
만관교 다음으로 향한 곳은 대마도에서 꼭 해봐야 한다는 ④에보시다케(烏帽子岳) 전망대로 향했다. 쯔시마 최고의 전망을 보기위해 적지 않은 긴 계단을 따라 해발 176m 정상에 올라서니 리아스식 해안의 아소우만 바다 위에 징검다리처럼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숲으로 가득한 섬의 진초록색이 인상적이었다.
에보시다케(오모자악) 전망대 이어 대마도 용궁의 전설이 전해온다는 ⑤와타즈미(和多都美) 신사를 관람하는데 신사 기둥문(とりい)이 바다에 떠있는 것이 신기할 뿐만 아니라 바다의 신을 모신 해궁으로 남아있는 전설에 의미를 더해주는 듯 다가온다. 정면 5개의 도리이(鳥居) 중 2개는 바닷물 속에 세워져있어 조수간만의 차이를 보일 때는 신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海水에 세워진 와타즈미 신사 문 이어 찾은 ⑥한국전망대는 쯔시마 최북단에 자리하고 있는 종로 탑골공원의 팔각정자 모양으로 세워진 관광지였다. 이 전망대는 전문가를 초빙해 설계 단계부터 완성까지 한국산 건축자재를 사용하는 등 철저히 한국 풍을 따랐다고 한다.
한국전망대 맑은 날에는 50km 떨어진 대한민국 부산 해운대와 거제시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으며 밤에는 광안대교의 야경이 왕관처럼 반짝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데, 청명한 날씨였지만 함께한 일행들은 아쉽게도 부산을 볼 수 없었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부산야경 전망대 바로 옆에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 추도비는 조선 숙종(1703년) 한천석을 비롯한 108명의 조선역관 일행이 부산을 출발해 해질 무렵 와니우라(鰐浦)로 입항하려 했는데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전원이 물에 수장되었기에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91년 추도비를 세웠다고 한다.
조선 역관사 조난 위령비 쯔시마는 수십 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었던 [조선통신사절]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일본이면서도 너무나 한국스러운 국경(國境)의 섬이란 생각이 내내 머문다. 조선은 임진왜란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1607년(선조)부터 시작해 1811년(순조)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사절을 파견하였다.
조선선 입진지도(朝鮮船入津之圖) 이후 통신사 파견은 경제적인 부담과 양국 내정악화로 인해 흐지부지 되었다. 옛 대마 도주(島主)들은 항시 일본 본토와 조선국 사이에서 양쪽의 눈치를 살펴가며 많은 고민을 해왔다고 한다. 아마도 무력적이던 일본보다는 문과 덕을 숭상한 조선에 편입되길 희망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가능성마저 생각되어진다.
몸과 마음을 툴툴 털어냈던 1박 2일 여정을 끝내고 북대마 ⑦히타카츠(比田勝) 항에 도착해 배에 올랐다. 귀선상(歸船上)에서 “지난날 선조들이 역사 한 페이지에 대마도가 조선 영토라는 기록을 남겨 두었었다면 독도뿐 아니라 또 하나의 우리 영토를 확보했을 텐데...”라는 여운을 남기며, 오후 6시 부산역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한잔에 피로를 푼 뒤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고 이내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