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고,
간 밤의 수면이 깊지 않았던 것 같다. 중간에 한 번은 눈을 뜨고, 이불을 걷고 자리를 나온다. 시계를 보니 2시 어느때쯤... 겹겹이 펼쳐놓은 홑이불들로 몸을 감싼다. 자정이 넘어서 잤으니, 단지 얕은 휴식을 취한 기분이다. 아직 배어있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어느덧 잠을 이어간다.
5.18 관련 행사인가, 제 3자의 모습으로 먼 발치서 보고 있는 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어느 나레이션이 목소리가 다소 익숙해진 <소년이 온다>의 문체로 기념식을 설명하고 있다. 눈을 뜬다. 마치 어두운 새벽인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역시 6시 몇 분이다. 어제와 같다. 그저께부터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고 있는 틈틈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영상이나 자료들을 찾아보곤 하고 있다. 관련 영화도 보기도 했다. 어떤 영상물은 50분정도의 분량이라, 빠르게 요약해서 볼 요량으로 시작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어느덧 화면 속의 진행을 알리는 bar는 ending부분에 가 있고, 마우스 위에 있던 손은 어느새 턱을 받치고, 뺨을 감싸고 있곤 했다.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년이 온다>책은 내게 이렇게 다가온다. 잡으면 쉽사리 중간에 끊을 수 없는 책이다. 하루 반나절만에 재독(再讀)을 마치는 중에, 지난 이틀 밤의 꿈 속에서 <소년이 온다>는 내게 이렇게 다가 왔다. 두 번 모두 5.18광주에 관한 모습으로, 책 속의 문체로, 한강 작가의 깊은 눈을 헤아려 보기라도 하는 듯이... 이 감정이 산화되어 놓치기 전에, 몇 자라도 남기고 싶어진다.
처음 <소년이 온다>를 접했을 때는, 5.18광주의 폭압과 희생에 대한 애통함과 울분에 가득찼다라고 한다면, 다시 읽은 두번째의 <소년이 온다>는 인간의 내면을 보게 된다. 5.18광주와 같은 학살과 희생이 비단, 한국에서만의 문제였을까? 이미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도 있었고, 아직도 반복되고 있지 않는가. 왜? 인간이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인간이 극도의 잔혹함을 갖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목숨을 걸고 고귀한 정의와 양심을 지키던 인간이 찰나의 고통회피, 단 1초의 들숨과 날숨, 똥과 오줌으로 지리는 고깃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잔혹한 폭력자가 원하는 고깃덩어리가 될 수 없기에, 죽은 우리 몸을 태극기로 감싸는 시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금이 가거나 부숴지면 버리게 되는 유리와 같이, 인간의 영혼이 짓밟히고 짓이겨진 이후에는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인간을 본다. 죽은 자식에 대한 한(恨)과 그리움으로 가득찬 삶의 방향을 잃은 부모를 본다. 그러나 이내 배가 고파지면,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수십톤의 슬픔이 짓누르고 있더라도, 잠이 오면 잠을 자는 우리는 그런 인간이다.
지난 번, <Act of Killing>이라는 영화를 본 기억을 더듬는다.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원 축출이라는 명목하에, 자행했던 대학살!!! 사람 죽이는 것을 오락으로, 위협으로, 또는 자랑으로 여기던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이 책에선, 두 손을 들고 항복하며 나오는 중,고등학생들을 향해 무참히 총을 쏜 후, '씨발, 존나 영화같지 않냐' 하는 장교의 모습을 본다. 이런 모습은 이미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대만에서도...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정치적으로 또는 힘에 의해 조작되어질 수 있다. 지금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빨갱이놈들 소탕이라고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모습을 본다. 친일파 및 매국노 지우기, 8.15가 대한민국 광복절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저 꼴들을 보는 현실을 산다. 이미 이스라엘 폭격에 의한 민간인 또는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정당성을 내세우려 애쓰는 모습들을 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으로 우리 생(生)의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인간은 그대로 인간의 속성을 상속받을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인간은 세계를 이루는 인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