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12/23

열차의 연착으로 시작하다...

by 하늘

오후 3시57분! 워싱턴 DC의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출발을 한다.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까지... 2025년 나만의 Adventure 시작이 코 앞이다.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고, 집에서 굴러다니는 연필 몇 자루와 조그마한 노트를 챙겨 넣는다. 과연, 스케치를 해 볼 만큼의 아름다움을 가져보는 시도를 해 볼 수는 있을까? 비단, 한 권의 책이었지만, 여행을 접하는 마음가짐을 점검해 봤다고나 할까?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꼭 눈을 뜨고 있진 않아도, 의미있는 또는 기억나는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지나가는 과정, 잠깐 멈추는 정차역, 또는 불편한 화장실 등도 모두 남기고자 하는 여행이어야 하겠다. 연착 시간을 대충 가늠해 보니, 1시간 후면 집에서 출발해도 괜찮을 듯 싶다. 그렇다면, 컴퓨터를 켜자. 책상에 앉아 몇 자라도 남겨보며 예행 연습이라도 하면 어떨까.




어젯밤이 되기 전까지의 Amtrak에서 보내 온 이메일은 '늦지 말아요, 부칠 짐이 있다면, 최소 1시간 이전에는 도착하세요!' 지각하지 말라는 경고성 톤을 느낀다. 어젯 밤 10시경?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열차가 연착합니다. 취소하고 싶으시면 refund 요청하세요. 100% refund 해 드릴께요.' 70여시간의 기차여행이기에, 나름 챙겨놓은 먹거리 가방이 터질 지경인데... 여기서 취소를 하겠다고? 안 할 걸 알면서도 친철하고 나이스한 고객대응의 매뉴얼대로 이메일을 보냈으리라. 올라 탈 기차의 출발역을 보니, 플로리다..!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거구나. 그리고 이 기차가 시카고까지... 참 멀고도 넓은 미국땅이다. 12시 57분! 또다시 전해오는 열차의 연착메시지... 훑어보니, 아침 9:55분을 시작으로 1시간 단위로 같은 메시지의 자동송부를 세팅해 놓았나 보다.




당초 예상시간보다 무려 3시간 30분이나 연착이다. 비행기의 연착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다. 이런 정도의 시간이라면 왠만한 피클볼 한 세션도 거뜬하다. 노트에 한 문장을 적는다.

"기다림을 즐기는 것, 그것이 여행을 즐겁게 한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스타일의 영화 리뷰를 Youtube를 통해 본다. 무료하게 뜬 시간이 눈가의 촉촉함을 부르고, 가슴 저려오는 어느 중년 아저씨를 감상에 젖게 한다. "You made my life complete!" 노년기의 사랑에는 익은 과일의 진한 향기가 나오는 법이다.




아들과 단 둘의 드라이브! 어느덧 22살의 어엿한 청년이 된 아들이 drop off를 시켜준다. 차 안에서 아들에게 말한다. 혼자의 여행을 잊고 살던 중년 아저씨의 앞으로의 바램도 담으면서...

'아빠의 이번 여행은 눈을 감고 다녀도 만족한 기억으로 남는 여행이었으면 좋겠어...'

여러 가방을 둘러매고 워싱턴 DC Union Station의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어둑한 조명이 일반 공항의 환함과 대비된다. 중년의 단독여행이 시작된다. '어느 곳에서 checked bag을 부치는 걸까? 더듬이를 치켜 올리고, 성큼성큼 기다란 데스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What can I get for you?"

"I would like to check a bag."

도와주고 있는 현장 직원이 bag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길을 열어준다. 그래, 영어는 쪼~금 한다고 하니, 이런 정도는 우습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그러나, 걱정마시라. 나의 우스꽝스러운 실수의 연발이 이어질 찰나이다. 어디를 가냐는 말에 자신있게 시카고로 간다고 대답을 하고, bag의 tag을 준비하는 직원과 웃음섞인 대화를 나눈다. 나의 e-ticket을 보여주면서... 시카고에서 다른 열차로 갈아타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자신있게 시카고로 얘기한 것이다. 그러고는 어디가 켕겼는지, 최종 목적지는 시애틀인데, 그럼 bag을 거기서 찾아서 다시 부치는 거니? 나의 마지막 질문에 '허허허...' 당황한 듯 웃음짓는 직원! 그가 물어봤던 것은 최종 목적지이고,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과 같이, 자신들이 transfer할 열차에 짐을 옮겨 싣는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다. 갈팡질팡 벌써부터 헤매는 건가? 옆을 둘러보니, 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Lounge 같은 곳이 눈에 띈다. 그럼 나도 그리로 들어가서 좀 쉬자. 안내데스크에서 갑자기 '티켓'을 보자고 한다. '엥? 혹시 Lounge를 따로 이용한다는 그 premium lounge ticket을 얘기하는 건가?' 일단 후퇴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중년남성의 더듬이로 상황을 해석해 본다. '아! 그렇군. 나의 train ticket을 보자는 것이군.' 또 한번 속웃음을 지으며 자랑스럽게 나의 e-ticket을 들이민다. 기대고 있을 기둥이 있는 구석자리, 재빠르게 laptop을 열고 나의 글을 이어간다. 어수룩한 중년의 첫날 여행, 기차 대합실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맛 본다.




결국, 예정보다 4시간이나 더 늘어진 연착! 열차에 오르는 플랫폼은 이미 어둑한 밤이다. 달리는 열차에서의 밖은 이미 어두움이 지배한다. 희미한 가로등,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뻘겋고 노란 눈동자들, 간간이 건물로부터 새어나오는 은은한 노오란 색깔이 밤의 세계와 함께 산다. 빛이 있어 밤이 빛나고, 까만 밤은 빛을 찬양한다. 어느덧 워싱턴 DC를 벗어나고 있겠지... 모처럼만에 들어보는 기찻길 위로 굴러가는 열차의 굉음을 벗삼아, 때때로 살아있는 기적소리와 함께, 그리고 인간들의 주고받는 이야기소리를 음악삼아 한 문장 한 문장 이어가 본다. 어느새 도착한 첫 번째 정거장, Rockville, MD. 시카고의 도착시간을 확인해 보니, 11:20am! 1시간 늦은 현지시간을 감안하면, 앞으로 14시간은 족히 기차 선로위를 달린다. 캐롤송도 없고, 크리스마스 장식도 없는 Amtrak에서의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시애틀까지의 마라톤 여행인지라, 나름 체력의 안배가 중요하겠지만, 나의 여행 첫 날에 쉽게 잠들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