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로구나!
어느덧 미국에 온 지 20년을 보낸다. 지난 동안의 여행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나'를 보려는 것인가? 하긴, 온전하게 혼자 일상을 벗어난 시간이 없었듯 싶다. 혼자이기에 가능한 지금의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내게 온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로구나! 올 해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기적소리와 함께, 징글벨 소리를 대신하며, 열차안에서 보내기로 한다.
새벽 1시 50분경, 화장실을 가고픈 신체의 알람이 나를 깨운다. 비행기 좌석에 비해 더없이 넓은 공간과 비어있는 옆좌석의 혜택으로 실컷 열차의 요동침이 전해온다. 좌우로의 흔들림은 물론이고, 상하의 미세한 떨림까지 주곤한다. 누워서 추는 테크노댄스야! 춤으로 즐기란다. 감았던 눈이 틈틈이 뜨여질 때마다, 웅크렸던 몸은 어느새 다른 포즈를 취하곤 한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누워서 하는 플랭크 운동인 것인가! 승객들의 잠 든 모습들이 열차칸을 이동하는 나의 눈에 들어온다. 얼굴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천차만별로 지친 몸을 쉬어 내고 있는 모습도 신기하다. 다리가 길어 슬픈 그대여! 도서관 책상에서 기막히게 엎드려 잤을 법한 그대여! 어린 아이들에 지쳐 젖을 물린 채 녹초가 된 그대여! 눈을 뜬 세상의 혼란함을 잠깐 접고, 눈 감은 고요한 세상의 나그네들을 싣고 시카고로 향하는 열차는 끊임없이 기적을 울려댄다. 밖의 세상은 이미 고요하다. 이젠 자동차의 움직임도 없다. 잠시 눈을 감고 어둠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가만있자, 시계를 보니 해가 나오려면 아직 2시간 정도는 있어야 할 듯 하다. 아침의 해가 세상을 비출 때를 하루 중 가장 좋아한다. 복숭아 빛 하늘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구름뒤에서 불에 태우 듯 뻐얼건 구름의 테두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오늘은 어떻게 날이 밝아올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독서일기를 아직 쓰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참이다. 틈을 이용해 감상의 마음을 옮겨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 아침 7시를 가리키는 시계침을 본다. 하나, 둘 씩 여기저기서 나그네들의 목소리들이 전해온다.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먼저 아침을 알린다. 엄마의 삶을 거쳐온 그들이 남성들보다는 일찍 세상의 깨어남을 알리는 것인가? 그렇게 열차안의 고요를 깨운다. 도시의 높은 빌딩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폭포수가 눈에 들어온다. "PORT OF CLEVELAND"라는 큼지막한 표지판 앞에서 반대편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준다. 어느덧 복숭아 빛의 하늘이 8시 방향에서 물들이기 시작한다. 그럼, 약간 남쪽으로 열차의 머리를 향하고 있나 보군. 하늘의 버얼건 부분이 세상에 넓게 퍼져간다. 눈에 보이는 끝없는 평지! 높은 건물이나 산봉우리로 가려지는 시야도 없다. 뻐얼건 하늘의 모습은 사막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그것과 다를바가 없다. 겨울 아침임을 잊고보면 말이다.
쟁여놓은 음식 가방을 열차 칸 뒤편의 가방보관대로 옮겨 놓은 후, 아무때고 걸음만 옮겨 팔을 뻗으면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를 안고 있는 듯하다. 뒷 칸의 카페음식에 비하면 맛과 영양도 그리고 신선함도 가득하다. 게다가 카페의 오픈시간에 구애받지도 않고, 오렌지 껍질의 상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다른 승객들은 뭐라 생각할까. 맨발에 슬리퍼, 편안한 츄리닝으로 갈아입은 지는 오래되었고... 이건 마치 기차 바캉스다! 작정하고 기차를 탄 선수나 다름없다. Cold Brew 모닝커피도 즐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약간은 무리했던 코스트코에서의 쇼핑이 나름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침의 고급 Danish, 점심의 샌드위치와 스낵, 게다가 고급 쵸콜렛 디저트까지... 시카고에선 한국음식으로 느끼함을 씻어내 볼까? 뭐, 다른 기차로 바꿔 탈 여유 시간만 된다면야... 오하이오를 지났으니, 시카고로 가고 있는 건 확실하다. 'Couple more hours...'라는 승무원의 목소리가 저 앞에서 들려온다.
시카고에 도착하기 마지막 정거장을 지난다. South Bend, IN! 앱을 열어 도착시간을 가늠해 보니, 12:33pm이다. 30분밖에 안남았다고...? 그럼 이제 슬슬 정리를 해 볼까? Blanket을 접고, 가방 속에 우겨넣고, 신었던 슬리퍼도, 벗어 놓았던 양말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장실도 들렀다가 Ready-Go 상태로 자리에 앉는다. 열차안에 퍼져오는 스피커 소리, 90분후에 시카고 도착이란다. 엥? 왠일? 30분 아니었어?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가? 아! 이런, 이곳은 central time zone으로 시간이 1시간이 늦다. 중년아저씨의 사소한 실수가 또 발견되는 찰나이다. 전화기를 손에 쥐고, 이제서야 auto setup에서 나의 지역을 refresh한다. 완전 자동이라기 보다는 반자동이네...그렇게 70여분의 기찻길을 남겨 두고 시카고로 향한다.
시카고에서 시애틀까지 46~48시간! 이제 main Amtrak 여정이 코앞이다. 당초 6시간을 예상했던 transfer 시간이 첫번째 기차의 연착으로 2시간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시카고 역 주변의 공원을 가 볼까, 또는 밖에서 여유있게 한국음식을 즐기고자 했던 당초 계획을 바로 접어 버린다. 역 주변에는 한국식당이 없다보니, 택시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 수고는 아예 하지않는 게 나을 듯 하다. 대신, 새롭게 도착할 cell phone의 shipping 상황을 체크하고, 군것질 꺼리나 즐기며, 역 안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또 다른 맛 아니겠는가. '기다리는 걸 즐기자고...' 아마도 출발할 때 가졌던 생각이 이번 여행의 메인 주제가 될 것 같다.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여행과는 달리, 혼자만의 여행이 주는 최고의 잇점이고, 최상의 맛이 아니겠는가! 30여분이 남았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된다.
시간은 예정된 3:05pm이 넘었고, 전광판에는 on board, 게다가 gate close라고까지 표시되어 있다. 승객 무리들은 Gate를 여는 건지, 줄은 맞게 서 있는 건지, 꿈뻑 눈을 깜빡이며 기다림의 바통을 서로 주고 받는다. 급기야 gate번호가 바뀌었다는 안내 방송도 나온다. 중년 아저씨의 눈치, 코치의 경륜이 통했는지, 바뀐 Gate번호의 맨 앞자리로 자리를 옮기고 여유롭게 지정된 좌석에 오른다. 플랫폼에 나와 있는 직원의 얼굴 빛이 아시안! 내게 인사를 건네며, Mr.Park이냐고 리스트를 체크한다. 오! 이런 대접까지를 받다니... 객차의 유일한 아시안이다보니, 그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나 보다. 게다가 여전히 두 사람의 좌석을 홀로 차지하고 가는 행운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2층에 있는 좌석을 정돈하고, 먹을거리를 얼른 챙겨, 이곳 observation 객차에 몸을 내던지며 어둑해져가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다. 산 속에서 나타나야 하던 사슴들이 들판에서 뛰어 다니고, 루돌프는 아니어도 6마리 무가족의 자유로운 놀이를 눈에 담는다. 사각의 울타리 안의 말들은 제각기 한가롭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길 주변가의 제법 녹지 않은 쌓인 눈을 보고 있노라면, 북쪽으로 온 것은 확실하구나.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이 내 앞에 있다. 화려한 트리는 없지만, 저 멀리 이름 모른 다리의 빨갛고 노란 조명이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을 상기시킨다. 'Merry Christmas!' 조용히 내게 인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