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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에스더 Oct 16. 2024

소담 소담 III

눈치  없고 매뉴얼만  아는 독일의사

11월  초에  독일에  도착하여   어학과정에

들어갔다.   어학을 하면서  나를 박사과정으로 받아 줄 교수를 찾아야 했다.

늦게 온터라 기숙사는 마감되어  도시 외곽에 방을 얻어  자취를 했다. 일찍 일어나 어학과정에 가면  오전에 끝이 났고,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집에  가야 하는데  집은 외로워서 가기 싫었다.


시내 구경을 하고  백화점도 구경했지만 대학도시라 백화점도 작아 볼게 별로 없었다. 길거리에서 물건 파는 아저씨도 구경하고  그 아저씨가 파는 채칼도 샀다. 보석방도  기웃거렸지만 돈이 없어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때 처음 카메오를 보았다.

 그러다 보니  해가 지려해 얼른 전차를 탔다.

독일의 겨울은 유난히 해가 일찍 진다.  시내는 상점과 가로등이 있어 차 안에서도 보였는데  외곽으로 가니  깜깜한 벌판에  흐린 가로등이 띄엄띄엄 있어 어딘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큰일 났다는 생각에 정거장 수를  세어 겨우 내렸다. 다행히 맞게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데,  어느 집 창가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다. 그 불빛이 왜 그리 차가워 보이던지.....

더 외로웠다.

집에 들어가  씻고 스프링이 이리저리 튀어나온  고물 침대에 누위  잤다. 그래도 이불은 오리털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천장  창문에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그렇다, 내 방은 다락방이었다. 평소라면  좋아하는 풍경인데  기쁨이 외로움에  가려졌다.


화장실에 갔는데 아파서 소변을 볼 수가 없고  피도 묻어났다. 아직 병원이 어디인지 몰라 선배 언니한테 연락을 했다. 그 언니가 나를  대학

병원으로 데려갔다. 이것이 고생의 시작이 되었다.


피가 났다는 말에  의사는 모든 검사를 다했다.

요도크기도 재고 방광크기를  재려 방광 안으로 액체를 넣기 시작을 했는데 방광이 터질 것 같아  소리를 질렀다.

" 내 방광은 너희보다 작다.  터질 것 같아 참을 수가 없다." "아직 덜 들어갔는데...."  

어이가 없어  다시 소리쳤더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어 화장실에 보내주었다. 난 얼마나 오래 소변은  봤는지 모른다. 아마 코끼리만큼 봤을 것이다. 소변 나오는 속도도 측정했다. 별것을 다했다.

그리고 이어 신장촬영을 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조영재를 맞고 촬영대에 워있는데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며  스멀스멀 가려웠다.  거울 좀 보려고 이리저리  살폈는데  거울이 없었다. 그러다 촬영대 귀퉁이에  깨진 거울 조각을 발견해 얼굴을 비춰보니  넓적하게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다.

저쪽에 서있던 간호사를 불러 내 얼굴을 보라고 하니, 화들짝 놀라 약병에 주삿바늘을 찌르는데 하도 떨어서  찌르지 못하고 갑자기  튀어나갔다.

조금 있으니 의사가 와서  주사를 놓으며  알레르기반응이  일어났다며 숨 쉬는 것은 괜찮냐고 물었다. 방금 해독제를 맞았으니 좀 노곤할 거라고  했다. 페니실린 알레르기 같은 거였는데 다행히 죽지 않고 넘어갔다.


검사결과는 요도가 좁아 방광에 무리가 간 것 같다며  항생제를  처방했다. 여태  건강히 살던 요도가 문제라니  납득되지 않았다.  괜한 고생만 한 가득했단 생각이 들었다.


독일에서의 생활이 끝날 무렵 또 병이 났다.

자주  설사를  하고  기운이 없다 했더니 의사가 위내시경을 권했다.

처음으로 하는 내시경이라 좀  무서웠다.

그때는 수면 내시경이 없어 죽어라 참아야 했다.

위의 움직임을 줄이는 주사를 맞고  내시경을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내시경줄을  넣어놓고 위조직을 떼기 시작을 했다.

앞조직, 뒷조직, 오른쪽, 왼쪽  차례차례  조그만 정육면체를  유리병에 하나씩  넣는 것을 보았다.

의사의  감이 있을 텐데 이렇게 다 떼어내다니,.... 갑갑했다.

검사가 끝나 이상이 있어 조직을  떼었냐고  물으니 " 매뉴얼이에요 " 라 했다.

집에 가서 소변을 보는데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아까 맞은 주사 때문이라 해서  약효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겨우 소변을 봤다.

일주일 후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별이상 없다였다.

정말 답답했다.


한 번은 10분 마취를  할 일이 있었다.

아침 8시에 시작했는데 나는 저녁 여섯 시에 정신을 차렸다. 계속 간호사가 깨웠는데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마취약이  우리에겐  센 양이었다.


그때는 동양인이 별로 없어 독일인에게 하는 대로 하면 우리에겐 너무 버거웠던 것이다.

지금은 동양인을  위한 매뉴얼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괜한 고생을  피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없다면 요구해야 한다.


눈치도, 손재주도 없고 매뉴얼 밖에 모르는 , 어찌 보면  갑갑한 독일의사가 가진 장점이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환자에게 빠르게 사과한다는 것이다.  환자를 보호자 모르게 검사실에 보내도 미쳐 말 못 해서 미안하다고 보호자에게  사과한다.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다,

물론 게슈타포 같은 이도 있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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