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밤새 내린 서리는 담장의 색을 하얀 가루가 뿌려진 멋지게 치장한 담으로 바꿔놓았다. 어울림이다. 오래전 어떤 수필에서 구두는 자신의 주인의 발모양과 걸음걸이 습관에 맞춰 자기 자신을 깎고 다듬어 주인과 일체가 되어 편안한 걸음을 제공한다는 희생에 관하여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발도 새 구두가 자기 발에 잘 맞아질 때까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자기를 깎고 뭉그러뜨리는 희생까지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희생과 맞춤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구두처럼 자신을 깎아내며 내게 맞춘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떠오른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아내와 부모님이었다. 가족의 어울림이 된 순간 대가 없는 희생을 말없이 수행했을 것을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라도 이제는 표현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 또한 일부는 저들을 위해서 깎아내 것들이 있을 것이다.
새벽 마당을 뒤로하고 거실의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불이 잘 붙는 마른나무껍질들을 넣고 마른 장작을 넣으며 공기가 들어가는 입구를 조절하고, 확 타오르고 나면 희나리를 넣는다. 마른 장작은 금세 타버리기 때문에 이런 절차를 밟는다. 이런 노하우는 예전에 지방대학에 있을 때 동네 어른들에게 배웠다. 벽난로의 불이 타오르는 과정에서도 이들의 하모니는 철저한 희생이다. 모두 자기를 태우고 재가 될 때까지 묵묵히 주변의 온기를 위해 그렇게 타고 또 태운다. 가족들 간의 하모니도 때론 힘들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사람들과의 어울림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드니 주변이 다 애처롭고 고맙다. 욕심쟁이들 마저도 다 타버릴 장작일 테니 가엽다. 주말 아침, 휴대폰은 여러 메신저의 소식들이 답지하는 울림이 직직거리고 나는 또 그 울림에 가벼운 인사를 한다. 모든 것이 죽어도 그들의 희생이 만들어 낸 사랑과 어울림이 영원하길 바라며, 오늘 나의 희생도 먼 곳과 가까운 곳에 보탠다. 힘을 내라 세상아,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