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공존
가을은 기온이나 해가 뜨고 지는 시간까지 봄과 닮았다. 그렇지만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는 곧 겨울이 올 것을 인간처럼 배우지 않아도 똑똑히 안다. 그러나 가끔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자연은 순수하다. 그리고 너무나 직관적이다. 느끼는 대로 자신을 표출하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인간들이 편의상 붙여놓은 절기의 이름 따위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낙엽이 진 자리에 새순이 돋고 꽃이 피었다. 문뜩 시퍼런 이성을 들이대며 공존의 파괴와 스스로가 자연의 하나임을 거부했던 여러 사건들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요즘 많이 화두가 되는 말들이 있다. 회복(Recovery), 지속 가능한(Sustainable) 등의 표현과 요구들이다. 이 말들에는 회복해야만 하는 파괴된 것들의 아쉬움과 앞으로 지속되어야 할 인간의 영속성의 한계가 보인다는 속내가 내포된 말이다. 감성적 표현으로 “철 모르고 살자”라고 표현한 적도 있지만, 거듭되는 철 모르는 못된 실수를 용인 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좀 더 자연에 순응해 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스스로가 자연의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 할 순간이다. 인간은 절기마다 할 것들을 정리하고, 학습된 경험을 후대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절기가 틀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졌다. 인간은 환경 적응형 동물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또 이 말에 다소 동의도 하고 어떻게든 삶의 양식을 만들고 보정하며 살아낼 것이란 생각도 든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읽다가 ‘피 흐르는 눈 2’에서 멈춰 있다. 저자는 8살 아이에게 인디언식으로 자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고, 아이로부터 받은 이름은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이다. 아이가 자기 이름은 “반짝이는 숲”이라 했단다. 저자는 자신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어린아이의 눈을 빌어 자신을 표현하고, 상징적으로 어린이의 맑은 생각을 빌려온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아이가 어떤 아인지 그 아이가 스스로 지은 아이의 이름을 통해 나타내려고 했다. 맑고 무한한 잠재력의 커다란 세계를 가진 아이를 표현한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저 아이를 초대하고 싶어졌다. 낙엽이 진자리에 다시 핀 새싹과 꽃을 보고 이 계절을 어떻게 이름 지을지 궁금해졌다. “꽃과 단풍을 다 사랑한 욕심쟁이?” 아니면 “낙엽 지는지 모르고 꽃 피운 멍청이?” 어떤 표현을 할까? 저 아이가 바라본 이 계절의 인디언식 이름이 궁금하다. 아들이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아빠에게 어울리는 책인 것 같아요. 멋지게 서평 한번 써 보세요.”라고 했다.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냥 나의 독서 방식대로 음미하고 난도질하고 곁에 두고 꺼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씩 꺼내서 시비 걸어 볼 생각이다.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지금 저 아이를 초대해 나를 소개하고 싶다. 내 이름을 지어달라고(어떤 이름이 나올지 두려움을 안고)
철쭉꽃이 핀 11월 중순, 나의 정원에서 -Sim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