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할 때 만났으니,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네. 몇 시간을 쉼 없이 이야기했으면서도, '이것도 이야기할걸' 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역시나 우리는 조만간에 또 봐야 할 것 같아.
나는 오늘 네가 한 질문이 계속 가슴속에 남았어.
"회사 그만둘 때 묻지 않았었는데, 워낙에 신중한 너이니 당연히 계획이 있었겠지? 그래, 계획하는 일들은 잘 돼 가는지 물어봐도 돼?"
그냥 대화를 이어나가는 흔한 질문 중에 하나였을 거야. 나도 흔한 대답을 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어.
'나는 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까?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일까?'
더 늦기 전에 이것저것 해봐야 한다는 합리적인 명분이 있었어.
'나는 뭘 더 할 수 있을까?'
사실 이런 생각은 6년 전 나이의 앞자리가 4로 바뀌고, ‘나’를 고민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질문 중 하나였어.
워낙에 직장이 바쁘기도 했지만, 나도 마흔은 처음이서 서툴렀지.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깊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아마 현업에 몰두하지 못해 생기는 사치스러운 생각이지 않을까 하고 그냥 덮어두었어. 그리고, 직장에서 좀 더 열심히 일하고, 결실을 맺어보자고 결심했지.
인생의 선택이야 옳고 그름은 없지만, 맞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이후 능력도 인정받아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커리어의 정점도 찍어보았고, 그 레벨에서만 알 수 있고,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나는 내 나이에 비해 훨씬 많이 경험할 수 있었어. 그래서 그만두어야겠다는 결정도 빨리 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회사에서의 일이 더 이상 새롭지 않았고, 익숙함이 게으름으로변해가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지. 자연스럽게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왔어.
'내가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반복하며 10년을 지낼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지금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뭘 더 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고민을 했어. 사실 결론은 이미 정해졌었지. 아마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을 거야.
신중년 시대, 70까지 일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앞으로 25년은 더 일해야 해. 지금까지 해온 일도 20년을 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새로운 일도 지금 시작하면 충분한 시간이 있어. 그래,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겠다.
어때 정말 이성적이고 설득적이지 않아? 그래서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어.
하기 싫은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YS. 이제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 볼게.
내가 20년 동안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알게 된 일에 대한 나만의 깨달음이 있는데, 돈을 더 많이 받는다거나인정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하기 싫은 일을 내가 더 많이 하기 때문이야. 정말 그래. 내가 좋아하는 일보다 하기 싫은 일들이 더 많아지는 순간이 오더라고.
어찌 이 세상 내가 좋아하는 일만 살 수 있겠어. 참으면서 하다 보면, 그 일에 익숙해져 할 만한 일이 되고 또 심지어는 좋아지게도 되는 법이야. 그러면, 성장이라 것도 같이 따라오지. 오! 얼마나 뿌듯하고 스스로 대견했는지 몰라. 그러나 이런 성장도 반갑지 않은 하기 싫은 일들이 늘어나게 되면,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고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게 되지.
이 고민은 꽤 여러 계절동안 나를 괴롭게 했었어. 어쨌거나 나는 내가 하는 이 일을 좋아하거든. 전부 싫은 것도 아닌데, 그냥 참고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바라보며 일해도 되지 않을까? 내 마음속에서 계속 저울질했었어.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지.
이 반갑지 않은 일들은 나의 능숙함으로 덮을 만큼 익숙해져 갈 뿐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 일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이렇게 인정하고 나니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더라고.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시도해 보자.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아보자.'
사실 나 하기 싫은 일이 너무 많아서 회사를 그만두었어.
나는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내가 점점 없어지더라고.
YS, 너에게 솔직히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된 더 깊은 이유도 말할 용기가 생겼어.
정확하게 46세가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아. 나이야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40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뭔가 이전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라. 육체적인 부분을 언급하지는 않을게. 내가 가장 크게 당황한 건(실은 좌절한 건) 내가 원하는 것과 동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의 차이가 좁히려고 애써도 점점 더 커진다는 거야.
유난히 젊은이들이 많은 회사에 나는 어느덧 나이가 많은 그룹에 속하게 되었어. 트렌드 이야기는 차마 낄 수가 없어 듣고만 있어야 했고, 그들이 나에게 원하는 건 내 의견이 아닌 그들의 의견을 이해하고 넉넉하게 응원하는 그 어떤 것이었어.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사장조차도 종종 ‘우리’의 의견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니 다르게 접근했으면 좋겠다고 에둘러 표현하며, '우리'라는 무리에 사실상 둘 밖에 없었으니, 나의 의견은 시대에 뒤처지니 들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지.
그러다 보니, 이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출근 시 옷차림, 머리모양, 염색 등 겉모양을 챙기고 있더라고. 물론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목적이 나의 장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조금이라도 ‘어려 보임’ 이라니, 이렇게 애써야 할 일인가 싶었지.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마음도 넉넉해지고, 이해심도 많아지고 지식이 지혜가 되어 존경도 받고… 이런 걸 꿈꾸었던 것 같아. 흠. 확실히 이해심이 많아져 그냥 타인을 더 인정하는 포용력은 커지는 것 같아. 주변의 능력 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는 나의 상황들과 비교하며 질투가 먼저였다면, 지금은 그들의 노력과 열심에 공감이 되면서 진정으로 응원하게 되거든. 심지어는 나이와 상관없이 존경심도 생기게 되지. 그런데, 내 안에 이런 이해심과 포용력이 넓어졌다고, 내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줄어들지 않더라고. 내가 남을 인정하는 마음과 내가 남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마음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어.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일하는 이유 회사에서 일하는 이유는 20대도, 30대에도, 40대에도 동일했던 것 같아. 열심히 일하고, 그 과정에 따른 성공을 이루며,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고한 주변의 인정. 그래. 바로 내 존재에 대한 인정이었어. 물론 실제로 존재감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해. 다만 내가 원하는 류의 존재감이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지. 나는 더욱더 열심히 일하며 나를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나에 대한 존재감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지.
나는 좀 더 인정받고 싶었어. 지금 이 직업으로 여기까지가 전부라면, 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일을 다시 찾고 싶었어.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었지.
YS. 나는 지금도 누가 왜 회사를 그만두었냐고 물어보면 그냥 더 늦기 전에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서라고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이유를 이야기해. 하지만 곧 마흔이 되는 너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어. 어떤 결정을 해야 순간들이 오면 누군가의 합리적인 말들로 나를 설득하지 말고, 내 안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라고.그러면 좀 더 준비할 수 있을 거야.
지금도 나는 감정에 의지해 내린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걸 보면,회사를 그만두길 잘했다고 생각해. 물론 불안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좀 더 기대하게 되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