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한 노래들(My favorite songs)
삼춘 다녀 올게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부른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놀 낀 하늘만
눈에 차누나
- 작사:박화목, 작곡:윤용하, 노래:문정선, 조영남
"우리 안나는 외삼촌이 인줄 쳐줬어. 문 앞에 새끼줄을 꼬아 달고, 배냇저고리 두 개하고 미역 몇 가닥을 영광에 가서 사왔지."
나는 외할머니댁에서 태어났다. 마치 동정녀 마리아의 출산처럼 아이를 잉태한적 없듯이 옥양목으로 배를 칭칭 감고 다니며 숨기다 태어난 아이라고 하셨다. 외할머니 음성 그대로는, '그 날 새벽 빠아안 동녁해가 떠오르는 그 시각에' 엄마는 나를 낳으셨고 외할머니는 산파가 되시어 나를 받으셨던 것이다.
아기를 낳자마자 딸이라는 소리에 엄마는
"죽여버려!"
"뭔 소리냐! 나는 그렇게 못해!"
외할머니는 나를 따뜻한 물에 씻기어 놓으시고, 그런 나를 엄마는 차가운 윗목에 밀어 올려 두시다 궁금하여 들여다 보니 너무 예뻤다고 하시며 나의 태 밖의 생명은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아브라함 100세와 사라의 90세에 본 아들 「이삭」이라고 하겠고, 나는 이 탄생의 이야기를 듣던 순간 또 얼어버려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까!>
사람들이 나의 말을 거짓이라고 믿는 이유들이 이에서,
즉,
"너는 미련하게 성경을 왜 그대로 하니! 너는 성경이야!"
라는 요즘 21세기 판단에서 비롯되기도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할 시간도 없이 나는 세상을 죽음반 삶반으로 살와 왔지 싶다. 나를 잉태케 하신 친아버지는 군대 병역(兵役)중이셨고 그 와중에 엄마는 3일에 한 번씩 군사우편을 받으시며 그 외로운 고통을 인내하심으로 나를 낳게 되신 것이었다.
틀림없이 아들일 것이라는 예상이 어긋나자, 엄마는 당황하여 그런 잔인한 말씀을 하게 되셨을 것이다. 외가에서는 아마도 어떤 아이가 나올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던 차에 딸이라 하는 순간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한 엄마의 긴박한 구호요청이었던 것이다. 즉,
"엄마, 미안해요. 결혼식도 못 올리고 아이를 낳고, 거기다 딸이라니. 죄송해요.", 라는
엄마의 진심을,
"불효자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내 딸이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최악의 위기상황에서 무책임성 책임의식의 전모(全貌)가 만든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죽이냐! 아이고 이뻐! 이뻐! 죽이지마!", 외할머니의 이 사랑 없이 나는 고향땅에서 살아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갓 고등학교 신입생이시던 외삼촌께서는 군내 고등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시다 누나의 출산 소식에 배냇저고리와 미역 두어가닥을 사오셨고 나의 단 한 분이신 외삼촌께 나는 마치 열여섯 살 차이나는 늦둥이 막내여동생처럼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스토리만으로는 외삼촌이 나의 친아버지인듯 느껴지는 것으로 오해들이 진을 치듯 하였나 싶으니 억울함은 하소연이 당여한 것이다.
"삼촌 군대가니 이거 너 써."
"우와! 진짜요?"
외삼촌께서 주신 것은 왕관표 금성라디오와 은빛 하모니카였다. 얼마나 갖고 싶던 것이었는데, 외삼촌이 쓰시던 작은방은 함부로 들어가지도 않던 나였는데, 그 방에는 늘 알수 없는 향기가 스며들어 있어 내게는 참 소중한 공간이었는데, 그 보물을 내게 쓰라고 주시고 가시다니, 나는 너무 감동하고 감사했었다. 아마 외삼촌께서 육군사관학교 지망에서 애석하게도 탈락후, 서울로 취업을 가실때도 가지고 가셨을 것 같은데 그때는 내가 겨우 서너살, 올 2024년부터 만나이제 시행으로 겨우 세살이니 그 기억은 알쏭달쏭하기만 한 시간을 지나 군입대 하시며 내게 건네주신 선물이었다.
「보리밭」은 외삼촌의 애창곡이었다. 외삼촌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미니카셋트나 MP3격 금성라디오를 들고 앞산에 올라 다니시며 봉우리에 앉아 들으시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시고는 하셨고, 대여섯살 나의 손을 잡고, 보채는 나를 데리고 가주시기도 하셨던 것이니 얼마나 감사한 축복이었던가.
나의 결혼 이후까지도 한 동안은 '보리밭'은 무조건 외삼촌 목소리가 내 중심이었다. 군대 제대하시고 오신 날, 나는 마지막으로 외삼촌 무릎에 앉았었다. 그게 나의 열 살(1977년 만9살), 어쩐지 이제는 다시 앉을 수 없는 자리라고 여기게 되던 큰집의 안방에서 다른 일가들과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외삼촌은 나의 제2의 아버지와 같았고 아버지보다 더 이상적 존재가 되심도 당연하셨었다. 하모니카 부는 법도 휘파람을 부는 법도 모두 초등학교 입학전 너댓살에 외삼촌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으로 나의 결혼 후, 우연히 발견된 나의 육아법들이 외삼촌께서 내게 하신 그대로였음이었으니 얼마나 경이롭던가. 아기를 안고 손톱 발톱을 깎는 일, 밥 먹을때 지켜야 할 일, 성냥개비로 숫자를 알려주시던 일, 공책에 ㄱ, ㄴ을 써서 알려 주시던 일,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일들, 부모님께 효도해야 할 일, 이웃들께 공손해야 할 일들, 자기방 소지를 늘 청결하게 해야 하는 일들, 마당을 깨끗히 쓸어야 하는 일들, 등등 이 모든 것들을 외삼촌께서 직접 내게 행하시고 나는 행복에 겨워 가르침을 받던 순간들이었던 것이다. 잊을 수가 있을까,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잊는다는 그 자체가 더욱 의심스럽고 은혜를 저버리는 악행인 것이다.
보리밭은 아동문학가겸 시인인 박화목(1924~2005)이 황해도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옛생각」이라는 시에 작곡가 윤용하(1922~1965)가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을 간 후 곡을 입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전혀 예상밖의 상황인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피난중으로 서울 등지에서 피난 온 음악가들과 부산의 음악가들이 함께 활동하거나 정착하면서 음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던 부산에서 만나게 되었고, 윤용하 작곡가가 종군 작곡가로 활동하던 때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박화목시인과 술을 마시다 구상한 곡으로 청소년에게 희망과 서정을 주고자 만든 사랑의 의미가 담겨 있다. 1953년 6·25종전 되던 해 발표되고 1970년대 음악 교과서에 실리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어다고 한다. ‘과수원 길’ 박화목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 국내ㆍ외 뉴스 < 지구촌뉴스 < 기사본문 - 소년한국일보
이 보리밭을 부른 가수로는 문정선, 조영남이 당시로는 유명하였으며, 문정선의 신뢰성 음색과 조영남의 비교적 맑음 음색이 어린 내 귀에서 외삼촌 목소리처럼 떠날날이 없던 듯 하며, 두 가수의 컴필레이션 음반에 문정선씨 노래로 수록되어 있다. 「이일병과 이쁜이」로 탄생한 이 앨범은 「조영남과 문정선」이라는 부제를 달고 1971년 11월 29일 오아시스레코오드사에서 제작되었다.
엄마는 나의 첫번째 남동생을 잉태중이시던 때였고 외삼촌은 고등학교3학년이었다.
금성 라디오가 완전히 내것이 된 것은 외삼촌 군대 제대 직후 서울로 재상경하시며 온전히 물려주시고 간 그 때, 1977년이었다.
-커버이미지 : Pinterest/4b2e0fd5cddcad247d8cb2793687a388.jpg
-Writer : Evergreen정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