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에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외할머니와 외가에 죄를 짓는 일로 다가온 때들로, 취학통지서가 온 동네 친구들에게 모두 전달 되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내게는 오지 않아 든 생각이기도 했었다. '나는 학교에 못 가나? 엄마랑 아빠랑 살지 않으니 못 가는 것일까?'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일이 늦어지고 보니 의심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 통보처럼 취학통지서가 내게도 도착을 하였고, 외할머니께서 하루는 단정한 하얀 한복에 반짝이브로치를 달아 입으시고 같이 학교에 가서, 이를테면 입학신고와 검사를 하여야 한다며 손을 잡고 같이 갔었다. 그 교실은 늘 종이와 낙엽이 타는 내음이 잔잔하던 소각장을 앞으로 한 별채 라인의 6개반이 있던 맨 마지막 교실로 2-2반이었고, 조금 늦은듯 아마 그날이 마지막 날 오후이었나 싶으며 내 뒤에도 한 두명 뿐이었지 싶다.
근엄하시면서도 낯선 두어명의 선생님들이 앉아 계시며 나무 의자에 앉히시고는
"이름이 뭐니?"
"정안나요"
"나이는?"
"여덟살이요"
"하나둘 셀 줄 알아?"
"예."
"어디 열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워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응. 그럼 됐어."
"이건 뭐니"
그리고 색맹 검사를 하고 귀가해도 된다고 하시어 돌아 왔었다. 아마 뒤돌아오는 찰나에 '내가 배움이 부족해서 입학이 안되려나?',라는 내 맘을 어찌 아셨는지, 입학해도 된다고 외할머니께 답을 주셨을 것이었고 나는 뛸듯이 기뻤다. 그 날 외할머니와 손을 잡고 돌아오던 신작로 위로 보이던 어스름 저녁빛은 참 고왔다.
드디어 입학식날, 준비해둔 옷핀으로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아마 책가방도 없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갔을터인데 진실로 이런 내 모습이 생각이 나지 않으며, 그저 가슴의 흰손수건과 '앞으로 나란히!'를 처음이며너도 다들 잘 따라하며 길게 줄을 섰던 친구들과 운동장 앞 구령대의 태극기가 찬란할뿐, 나의 행색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책가방이랑 구두를 미리 사주시지 않아 그런 의심들을 했었던 것이었다. 나는 생각도 못했었다. 내가 검정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갈줄은, 책보자기에 책을 넣어 메고 다닐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않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그런 비애가 들어올 틈없이 내게 기쁨의 샘물을 폭풍처럼 쏟아부었고, 나는 글을 익히는 일에 매료되어 받아쓰기 100점, 산수도 100점, 늘 100점 맞는 일에 흠뻑 빠져, '나는 국어선생님이 될거야!',로 꿈이 바로 들어섰고, 그저 학교가 천국이었다.
「학교종」은 1학년 음악책 첫 번째 곡이었다. 두번째 곡은 「봄나들이」, 세번째는 아마도「태극기」나 「송아지 」였을 것이다. 음악책을 하루에도 몇번씩 하교후 훑어보고 또 보고 보았던지, 슬픔이란 오간데도 없던 행복의 순간들이었다.
이러힌 '학교종'을 만드신 분이 <김메리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며칠 전에야 알고 또 한 번 놀랐었다. 부산에 「메리놀」이라는 정신병원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고, 2003년경부터 낯선 문자가 계속 도착하였었다. 그것은 바로 '모월 모일 예약이 되어 있으니 내원하라'는 안내문자였고, 기분이 나빠 올때마다 삭제를 했었다. 그리고 '메리놀 병원'이라고 적힌 발신처를 그저 농담으로 희롱하는 문자로 여겨 이러한 이름의 병원이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몇년이 지나도 계속 이어지는 문자에 전화를 걸었었다. 그 병원에 가본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니 문자 보내지 말라고 요청을 하였더니 이후 한 두번인가 오고는 없는 지금인 것이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다 이 글 주인「학교종」을 기억하고 이를 쓰고자 검색을 해보곤 깜짝 놀랐던 것이다. 아니, 혹시, 그 메리놀이 김메리선생님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라기 보다는 의심없이 그 메리가 이 메리구나 라고 여긴 것이다. 이건 부주의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하는 것으로 다시 검색을 해보니 Maryknoller는 (1911년 NewYork 주(州) Maryknoll에서 T.F.Price와 J.A.Walsh가 설립한 카톨릭 해외 전도회의) 메리놀 회원이고, Maryknoll Medical Center(메리놀 병원)은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에 있는 병원으로 1950년 4월 미국 메리놀수녀회에서 설립하였고, 초대원장은 메리 머시 허쉬벡(Mary Mercy Hirschboeck)수녀라는 것이다. 모두 다 다른 의미를 가진 다른 곳들인 것이다.
미국 이름은 메리킴·메리김으로 1904년 출생한 김메리선생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과 미시간대학교에서 전액장학금을 받고 석사과정을 수료한 교육계 신여성으로 남편이 일제에게 친미파로 몰리어 강제 추방당하고 출국금지에 따라 홀로 살았으며, 1945년 해방직후 초등학교 음악교과서 편찬 작업에 참여 하며 전차 속에서 어린이들이 입학식 날 처음으로 등교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작사·작곡한 곡이 한국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동요 <학교종>이라는 것이다. 73세 고령에 평화봉사단에 자원하여 아프리카 서부 라이베리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위생 식기들이 라이베리아 열대병을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라이베리아에 「숟가락 보내기 운동」도 펼쳤었다고 한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은 다들 잘 있는지, 그 친구들은 최소한 죄없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었는데 너무 오래토록 40년이상을 소식을 전하지 아니한 내가 그들에게 죄인이 되가는 것인지 서툰맘이 앞서기 시작하는 요즘이었던 것이다.
어린 한 때 우리집에서 기르던 예쁜 복슬강아지 이름이 '메리'였던 적이 있어다. "메~리! 메~리! 이리와!" 그 메리는 참 착한 나의 애견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