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큰애가 일층에서 할머니와 얘기를 하고 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이야기 중인가 싶었다. 꽤 오래 있다가 이층으로 올라온 큰애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 할머니가 손톱 깎기 힘들다고 그래서 내가 손톱 깎아드렸어."
"아, 그래서, 이제 올라 온 거야?"
"어. 그리고 엄마, 할머니가 에어팟 끼고 있는데 자꾸 말 걸어. ㅋㅋㅋ"
"아, 그거, 할머니가 몰라서 그래. 할아버지도 몰라."
"아니야, 다 알아. 내가 언제 말했어."
"아 그래? 무선이라 더 모르실 텐데? "
"내가 식탁에 다리를 다 올리고 에어팟 끼고 편하게 앉아 먹고 있었거든. 할머니가 들어오시길래 물 마시러 들어왔나 보다 했는데, "앉을 데가 없어 나가야겠네." 하더니 또 들어오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할머니, 나한테 할 말 있어?" 하니까 "아니야." 하면서 나가시더라구. 뭐 얘기 하고 싶은 눈치길래 설거지 하고 얘기 좀 하고 왔어."
공부도 해야 하고 할 일도 많지만, "할머니랑 조금 놀아주고 왔어.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이다. 본인 스스로 대견한 모양이다. 내가 봐도 너무 기특하다. 까칠한 둘째와 천방지축 막내도 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챙겨주는 건 역시 첫째다.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2주 동안 산후조리를 했다. 첫째는 엄마한테 가서 조리를 했는데 영 힘들었다. 젖을 먹이고 싶었는데 그것도 실패하고 엄마도 몸이 약해 나를 챙겨주시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서 어른들께 산후조리를 부탁하는 것은 아니다 싶었다. 큰맘 먹고 둘째는 산후조리원으로 갔다. 그 때 첫째는 4살.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싫어 6살부터 유치원을 보냈다. 할머니랑 살고 있었으니 거부감 1도 없이 할머니랑 함께 자고 먹고 엄마 없이 잘 지냈다. 어머니는 아주버님 가게 일을 안 나가시면서부터 의료기기업체를 다니시면서 할머니들이랑 친분을 쌓으셨다. 거기를 매일 첫째를 데리고 다니셨나보다.
가서 할머니들이랑 체조도 하고 할머니들이 주시는 간식도 먹고 할머니 옆에 누워 의료기기 체험도 하면서 어린이집을 안 다녀도 훨씬 재미있게 할머니랑 지냈다.
어머니는 첫째 때문에 힘든 적이 없었다고 지금도 얘기하신다. 버스 타고 나갈 때면 "그렇게 씩씩하게 버스기사에게 인사를 했다"고 지금도 첫째 어릴 때 얘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는 단골 멘트다.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코로나 걸리면 안돼. 우린 조금 멀리 앉아서 밥을 먹을 테니..... 엄마랑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챙겨줘."
올여름 나와 남편이 코로나에 걸렸다. 일주일 후 아이들이 차례로 걸렸다. 올해가 어머니 팔순이라 호텔 뷔페에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는데 아이들이 앓고 일주일 정도 지나 날짜가 딱 겹쳤다. 부모님은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와중에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셨다.
첫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면 두분이 코로나에 걸릴까 봐 내내 걱정이 되었나 보다.
나와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외식을 하러 가면 할어버지를 챙기는 건 늘 첫째 몫이다. 아버님도 나와 남편보다는 첫째랑 다니시는게 조금 더 편한 눈치다. 남편이랑 아버님은 사이가 썩 별로이고 며느리는 또 살짝 어려운 존재니 만만한 첫째가 제일 편하실 거다.
"할아버지는 눈이 안 좋아서 낮에도 약간 컴컴한 데 가면 넘어질까 봐 엄청 겁내하니까 엄마가 할아버지 잘 챙겨 줘. 호텔 화장실 어두컴컴하잖아. 엄마가 밖에서 할아버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아빠는 할머니 챙겨드리고."
남편은 "할아버지가 그러는 것은 다 엄살이야"라고 대꾸한다. 그러면 첫째는 "엄살 아니야!"라고 펄쩍 뛴다. 부모랑 딸이 서로 바뀐 것 같다. 우리 부부는 무심한 편인데 첫째는 의외로 살뜰하다.
첫째가 부모님한테 하는 것을 보면 내심 '저런 며느리랑 살면 두 분이 좋으시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난 밥만 잘하지 무심한 편이고 살갑지도 않다.
첫째방에는 할머니가 챙겨준 건강보조식품이 가득하다. 며느리랑 아들은 안 주고 첫째만 주신다.
'나는 받은 기억이 거의 없는데, 아들에게는 나 몰래 주시려나···.'
우리 집 첫째는 유독 말랐다. 첫째를 보는 게 너무 안타까운 시어머니는 안쓰러운 마음이 잔소리가 된다. 공부하고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셨나 보다.
"할머니, 말 좀 이쁘게 하면 안돼? 나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신다. 손녀가 화가 많이 난 것을 직감하신다.
"할머니, 그럴 때는 "우리 현희 공부하느라 애썼다. 수고했어~", 이렇게 말하는 거야. 할머니가 내 걱정 해주는 건 잘 아는데 듣는 내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며느리인 내가 들어도 민망할 정도로 팩폭이다. 할머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바쁘고 정신없는 22살이 할머니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어머니는 아이하고 눈도 못 마주치고 허공을 보며 "미안해"를 연발하신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나는 아이를 달래고 올려보냈지만 손녀한테 혼나서 민망했을 어머니가 더 신경쓰인다.
"엄마, 나도 알바하는데 보건증 내야 하고 할머니도 공공근로 급식 도우미 하는 거 보건증 필요해서 인증 받느라 내가 깨톡도 설치해 주고 프사에 할머니 사진도 올려줬어. 할머니가 저번에 호텔 가서 찍은 사진으로 올려달라고 해서 내가 해줬어. 그리고 에어팟으로 노래도 들려줬어. 엄청 신기하대~~ ㅋㅋㅋㅋ"
요즘 아이들은 에어팟을 끼고 태블릿이나 핸드폰을 보며 혼자서도 밥을 잘 먹는다.
혼자 밥을 먹는 아이가 심심할까 봐 어머니는 슬쩍슬쩍 들여다 보신다. 옆에 가서 두런두런 말이라도 걸어줘야 하나, 신경쓰는 눈치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밥을 먹으며 티비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 누가 오는 게 더 귀찮다. 이런 상황을 몇 번 경험하시고는 어머니는 아이들 옆에 가질 않으신다.
여자 아이들은 화가 나면 냉랭한 공기가 시베리아 한파보다 더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다 큰 손녀들이랑 한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얘기하고 싶어한다. 며느리보다 아들보다 더 애잔하다.
할머니에게는 두런두런 대화가 필요하지만
손녀에게는 에어팟이 더 필요하다.
할머니의 사랑도 와이파이처럼 제대로 잡히고 할머니의 서운함과 허전함, 그리고 외로움까지도 큰 아이의 에어팟으로 우리 모두와 소통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