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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페이페이정윤
Oct 09. 2024
여보, 설거지 처음 하세요?
"여보, 설거지 처음 하세요??"
" 왜? "
"
밥 먹은 그릇하고 수저만
닦아? 여기 빈 냄비랑 프라이팬은 안 보여 ?
"
" ......"
남편은 자기 엄마랑 살아서 근 20여년을 설거지를 안했다. 집안에 여자가 둘이나 있는 데다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어머니가 말리셨다. 거시기가 떨어진다나 뭐라나...
애들 키우면서 다른 것은 도와줘도 설거지는 안하더라. 엄마가 늙으니 이제는 남편도 설거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머니도 당신 코가 석자라 거시
기
가 떨어지건 말건 안 말리신다.
대가족의 설거지는 항상 많다. 어머니가 끓이신 국, 내가 끓인 국, 아이들 먹을 김치볶음밥
부모님 드시라고 해놓은 호박볶음. 등등
냄비 두개, 프라이팬 두개는 기본으로 나온다.
어머니는 밀폐용기를 모른다. 아니 모른 체 하신다.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으시는 법이 없다. 다시 끓여 놓으면 안상한다 는 이상한 논리로 계속 냄비 채 끓여 놓으신다. 결혼하고 내가 부지런해진 이유는 어머니의 이런 습관 때문에 일단 부엌에 들어가면
최소 30분은 기본으로 할일이 생긴다.
당신이 해놓으신 음식 포함 내가 해놓은 것까지 절대 냉장고에 넣으시는 법이 없다.
그것들을 옮기고 정리하는데 최소 30분, 어떤 날은 한시간도 걸린다.이러다 부엌에서 전사하는 건 아닐까...싶었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그릇이 마르면 다시 정리하고
또 밥하고 설거지하고
간식까지 하나 해먹일라면 아주 꼴까닥 넘어갈 지경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죽을까봐 맥주도 먹어봤고 싸우기도 해봤고 어머니께 잔소리도 해봤지만
어머니는 1도 변함이 없으시다. 너무 한결같아 존경스럽다. 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변한다고 하는데...
건강하게 오래 사실것 같다.
방법은 내가 부지런해져서 살아남는 수밖에 없다.
가게에서 모든 끼니를 해결하고 오시던 이쁜 남편은 올해 초부터
집밥을 드시겠다고 점심을 집에서 드셔 주신다.
너무 이뻐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시아버지도 집에 종일 계시는데 남편까지 집에서 점심을 먹겠다니... 이건 나보고 가출을 하라는 신호다.
나를 쫓아내려는 계락인 듯 싶다.
나는 대놓고 싫다는 표시를 냈지만 남편은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사먹는 밥이 맛이 없어서 무조건 집밥은 맛있으니까 신경쓰지 말라 한다. 반찬투정을 안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어? 나는 미역국은 별론데...."
" 어제 가져온 오이는 안 무쳤어? 그거 오이 맛있는 건데..."
" 코스트코에서 베이컨은 안 사왔어? 아스파라거스 가져왔는데."
반찬투정 안한다며?
아무거나 잘 먹는다며?????
가뜩이나 점심시간이 바쁜 나는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
" 내가 빨리 먹고 씻고 일하러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하루종일 밥만 하는 식모야????
먹고 싶은게 있으면 반찬가게에서 사오던지, 여기 저기 냉장고 뒤져서 먹을 만 한 것 찾고 조금 남은 반찬은 빨리 먹어
치우고소시지도 베이컨도 먹고 싶으면 알아서 볶아.
정 없으면 계란 후라이라도 해서 나도 먹게 준비해 놔 . 앞으로 당신이 먼저 오면 무조건 밥 먹을 준비 해 놔. 알았지?? "
나의 폭탄 잔소리 이후 남편은 점심을 차려놓기 시작했다. 며칠은 함께 먹는게 영 불편했는데
하루 이틀 지나니 제법 적응이 되어서 죽이고 싶은 맘은 사라졌다. 수저도 놓고 반찬도 꺼내놓고 냉장고에 뭐가 있으면 먹어도 되냐고 전화해
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잡탕 반찬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국도 뜨겁게 데워놓았다.
그러면서 주방 전체를 스캔했다.
어디에 어떤 그릇이 있는지
전자렌지에 데울때는 어떤 그릇을 쓰는지
국물이 튀기 때문에 뚜껑을 덮어서 전자렌지에 데워야 하는 음식은 무엇인
지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힘들게 가르치고 잔소리한 보람이 있었다.
설거지를 하려는 남편은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비장하다. 남편들이 키우기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알려주면 제법 잘 하긴 한다.
중요한 건 꼭 한번에 하나씩만 가르쳐야 한다는 점
잘한다고 트랜스포머를 원했다간 밥상 엎을 각이다.
앞치마를 두르고 핸폰으로 넷플릭스를 켠다.
고무장갑은 절대 안끼고 맨손으로 한다.
손의 감각을 느끼면서 해야 한단다
. 설거지를 하는건지 드라마를 보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천천히 집중해서 한다. 나는 계속 음식을 덜어내고 설거지 거리를 준다.
" 아니...왜 이렇게 설거지가 계속 나와? "
" 여보, 당신이 이렇게 점심에 안해주면 내가 퇴근하고 와서 다 정리해야 해. 이렇게 밥도 차려주고 정리도 많이 해주니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요즘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고마워"
" 저 냄비도 닦으면 되나? 하하하!!"
칭찬 한마디에 남편은 나라를 구한 장군같은 표정이다. 나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년이라 남편이 차려주는 밥은 기대도 안했는
데
세월이 지나고 부모님이 늙으시니 이런 날도 온다.
남편아 내일도 설거지 잘 부탁해!
어머니가 닭 삶으신다 했으니 아주 큰 곰솥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프라이팬은 꼭 부드러운 수세미로 닦아야 해
기름기 많은 그릇은 꼭 한번 키친타월로 닦고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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