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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페이정윤 Oct 11. 2024

할머니가 에어팟 끼고 있는데 자꾸 말걸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큰애가 일층에서 할머니와 얘기를 하고 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이야기 중인가 싶었다. 꽤 오래 있다가 이층으로 올라온 큰애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


"엄마, 할머니가 손톱 깎기 힘들다고 그래서 내가 손톱 깎아드렸어." ​


"아, 그래서, 이제 올라 온 거야?" ​


"어. 그리고 엄마, 할머니가 에어팟 끼고 있는데 자꾸 말 걸어. ㅋㅋㅋ" ​


"아, 그거, 할머니가 몰라서 그래. 할아버지도 몰라." ​


"아니야, 다 알아. 내가 언제 말했어." ​


"아 그래? 무선이라 더 모르실 텐데? " ​


"내가 식탁에 다리를 다 올리고 에어팟 끼고 편하게 앉아 먹고 있었거든. 할머니가 들어오시길래 물 마시러 들어왔나 보다 했는데, "앉을 데가 없어 나가야겠네." 하더니 또 들어오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할머니, 나한테 할 말 있어?" 하니까 "아니야." 하면서 나가시더라구. 뭐 얘기 하고 싶은 눈치길래 설거지 하고 얘기 좀 하고 왔어." ​


​공부도 해야 하고 할 일도 많지만, "할머니랑 조금 놀아주고 왔어.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이다. 본인 스스로 대견한 모양이다. 내가 봐도 너무 기특하다. 까칠한 둘째와 천방지축 막내도 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챙겨주는 건 역시 첫째다. ​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2주 동안 산후조리를 했다. 첫째는 엄마한테 가서 조리를 했는데 영 힘들었다. 젖을 먹이고 싶었는데 그것도 실패하고 엄마도 몸이 약해 나를 챙겨주시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서 어른들께 산후조리를 부탁하는 것은 아니다 싶었다. 큰맘 먹고 둘째는 산후조리원으로 갔다. 그 때 첫째는 4살.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싫어 6살부터 유치원을 보냈다. 할머니랑 살고 있었으니 거부감 1도 없이 할머니랑 함께 자고 먹고 엄마 없이 잘 지냈다. 어머니는 아주버님 가게 일을 안 나가시면서부터 의료기기업체를 다니시면서 할머니들이랑 친분을 쌓으셨다. 거기를 매일 첫째를 데리고 다니셨나보다.

가서 할머니들이랑 체조도 하고 할머니들이 주시는 간식도 먹고 할머니 옆에 누워 의료기기 체험도 하면서 어린이집을 안 다녀도 훨씬 재미있게 할머니랑 지냈다.


어머니는 첫째 때문에 힘든 적이 없었다고 지금도 얘기하신다. 버스 타고 나갈 때면 "그렇게 씩씩하게 버스기사에게 인사를 했다"고 지금도 첫째 어릴 때 얘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는 단골 멘트다. ​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코로나 걸리면 안돼. 우린 조금 멀리 앉아서 밥을 먹을 테니..... 엄마랑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챙겨줘."


올여름 나와 남편이 코로나에 걸렸다. 일주일 후 아이들이 차례로 걸렸다. 올해가 어머니 팔순이라 호텔 뷔페에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는데 아이들이 앓고 일주일 정도 지나 날짜가 딱 겹쳤다. 부모님은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와중에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셨다.

첫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면 두분이 코로나에 걸릴까 봐 내내 걱정이 되었나 보다.

나와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외식을 하러 가면 할어버지를 챙기는 건 늘 첫째 몫이다. 아버님도 나와 남편보다는 첫째랑 다니시는게 조금 더 편한 눈치다. 남편이랑 아버님은 사이가 썩 별로이고 며느리는 또 살짝 어려운 존재니 만만한 첫째가 제일 편하실 거다.


"할아버지는 눈이 안 좋아서 낮에도 약간 컴컴한 데 가면 넘어질까 봐 엄청 겁내하니까 엄마가 할아버지 잘 챙겨 줘. 호텔 화장실 어두컴컴하잖아. 엄마가 밖에서 할아버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아빠는 할머니 챙겨드리고."


남편은 "할아버지가 그러는 것은 다 엄살이야"라고 대꾸한다. 그러면 첫째는 "엄살 아니야!"라고 펄쩍 뛴다. 부모랑 딸이 서로 바뀐 것 같다. 우리 부부는 무심한 편인데 첫째는 의외로 살뜰하다.


첫째가 부모님한테 하는 것을 보면 내심 '저런 며느리랑 살면 두 분이 좋으시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난 밥만 잘하지 무심한 편이고 살갑지도 않다.


첫째방에는 할머니가 챙겨준 건강보조식품이 가득하다. 며느리랑 아들은 안 주고 첫째만 주신다.


'나는 받은 기억이 거의 없는데, 아들에게는 나 몰래 주시려나···.'


우리 집 첫째는 유독 말랐다. 첫째를 보는 게 너무 안타까운 시어머니는 안쓰러운 마음이 잔소리가 된다. 공부하고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셨나 보다.


"할머니, 말 좀 이쁘게 하면 안돼? 나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신다. 손녀가 화가 많이 난 것을 직감하신다.


"할머니, 그럴 때는 "우리 현희 공부하느라 애썼다. 수고했어~", 이렇게 말하는 거야. 할머니가 내 걱정 해주는 건 잘 아는데 듣는 내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며느리인 내가 들어도 민망할 정도로 팩폭이다. 할머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바쁘고 정신없는 22살이 할머니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어머니는 아이하고 눈도 못 마주치고 허공을 보며 "미안해"를 연발하신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나는 아이를 달래고 올려보냈지만 손녀한테 혼나서 민망했을 어머니가 더 신경쓰인다.



"엄마, 나도 알바하는데 보건증 내야 하고 할머니도 공공근로 급식 도우미 하는 거 보건증 필요해서 인증 받느라 내가 깨톡도 설치해 주고 프사에 할머니 사진도 올려줬어. 할머니가 저번에 호텔 가서 찍은 사진으로 올려달라고 해서 내가 해줬어. 그리고 에어팟으로 노래도 들려줬어. 엄청 신기하대~~ ㅋㅋㅋㅋ"


요즘 아이들은 에어팟을 끼고 태블릿이나 핸드폰을 보며 혼자서도 밥을 잘 먹는다.


혼자 밥을 먹는 아이가 심심할까 봐 어머니는 슬쩍슬쩍 들여다 보신다. 옆에 가서 두런두런 말이라도 걸어줘야 하나, 신경쓰는 눈치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밥을 먹으며 티비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 누가 오는 게 더 귀찮다. 이런 상황을 몇 번 경험하시고는 어머니는 아이들 옆에 가질 않으신다.


여자 아이들은 화가 나면  냉랭한 공기시베리아 한파보다 더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다 큰 손녀들이랑 한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얘기하고 싶어한다. 며느리보다 아들보다 더 애잔하다.


할머니에게는 두런두런 대화가 필요하지만

손녀에게는 에어팟이 더 필요하다.

할머니의 사랑도 와이파이처럼 제대로 잡히고 할머니의 서운함과 허전함, 그리고 외로움까지도 큰 아이의 에어팟으로 우리 모두와 소통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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