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속 사라지는 기억들
엄마 집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엄마의 치매 상태가 점점 심해져 감을 깨닫게 되었어요. 마음속에서 울컥함이 올라옵니다. 이렇게 냉장고를 지저분하게 쓰실 분이 아닌데 엄마의 사라지는 기억들이 이제는 정리하는 힘을 잊어버리게 하는 모양입니다.
엄마는 젊은 시절부터 치매 진단을 받기 전까지 엄청 깔끔하신 분이셨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마당을 정리하시고, 집에 있는 방문은 모조리 열어 환기를 시키셔야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시골에 살아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우리 엄마는 티도 나지 않는 오래된 옛날 집구석구석을 그렇게 아끼며 쓸고 닦으셨어요.
자식들이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고 해도 싫다며 반대를 하시더니 이렇게 치매까지 진단받고 나니 더더욱 이사가 힘들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골집에 혼자 사시게 된 엄마께 자식들은 말씀드렸어요.
"엄마 이제 아파트로 이사 가셔서 편하게 사세요. 왜 이사를 안 가려고 하시는 거예요?"
"난 마당 있는 집이 좋다. 텃밭에 상추도 심고, 파도 심어서 너네들 올 때 나눠주는 것도 좋고, 아파트는 마당도 없고 답답해서 싫다"
결론은 마당이 없는 아파트는 답답해서 그냥 오래되었지만 마당이 있는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때 좀 더 성질을 부려서 아파트로 이사를 하지 않았던 저를 포함한 우리 남매를 아주 미워하는 중입니다. 80대 중반 노인네가 혼자서 살기엔 오래된 옛날 집이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지요.
치매 진단을 받고 바로 이사를 계획했지만 담당 의사 선생님께선 치매 환자들에겐 익숙한 곳이 가장 좋다며 낯선 이사가 치매에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하셔서 또 이사를 주저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엄마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집에 길들여진 모든 것이 편안하신 모양입니다.
겨울에도 가스비 아낀다고 온도를 낮게 해 놓으셔서 딸들의 잔소리를 들으셨지만 결국은 고쳐지지 않는 불치의 습관이십니다. 딸들이 드시라고 냉장고 가득 채워드린 반찬통엔 곰팡이만 가득하고, 아직도 본인의 냉장고는 손도 대지 말라고 하시기에 교회에 가신 틈을 타 냉장고 정리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식들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고 싶어 하시던 나눔과 베풂의 아이콘이셨던 우리 엄마는 이제 먹을 것을 냉장고에 가득 채우기만 하고 버리기를 아까워하시는 치매 어르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다행이신 거 엄마께 주신 최악의 인생 선물 치매가 그나마 착한 치매라는 이름으로 온 것입니다.
항상 안부 전화드리면 "우리 딸 최고야. 고마워~ 우리 사위 황서방이 최고네. 고마워~"를 잊지 않고 얘기해 주십니다.
냉장고에 반찬 가득 준비해 두시고 자식들이 멀리서 방문하면 돌아갈 때 한 보따리씩 냉장고 반찬 꺼내고, 냉동고에서 시골 장날 사두셨던 여러 가지 곡물들을 싸주시며 내리사랑을 한 보따리씩 챙겨주시던 우리 엄마! 예전 손주 손녀들이 유치원에서 만든 미술 작품들로 가득하던 안방에 이젠 엄마가 놓지 원에서 만든 작품들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 우리 엄마 만들기 솜씨가 최고네. 어쩜 이리 잘 만드셨지?"라는 딸과 사위의 칭찬에 입꼬리가 올라가시는 우리 엄마! 옛날 총명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엄마가 교회에서 돌아오시기 전에 냉장고를 말끔히 정리해 두었습니다. 1주일 드실 간단한 것들만 챙겨서 넣어 두었습니다. 우리 자식들의 보호자였다가 이제는 우리의 보호를 받게 된 우리 엄마의 사라지는 기억들을 꽁꽁 묶어서 엄마의 생각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 두고 싶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