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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오라 Sep 25. 2024

나는 나를 위로하고 싶다.

나를 향한 위로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에피 1.

나는 나를 위로하고 싶다.








“ You can go. ”


열심히 캐스팅을 돌다 보면 굉장히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이제 가도 좋다는 뜻으로, 모델들에겐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말이다.

(그 이유는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하자.)

보통 해외에서 어떤 한 브랜드의 캐스팅을 가면 몇 십 명의 많게는 몇 백명의 모델들과 조우하는 경험을 하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서양권 모델들이고 나머지는 소수의 동양권 모델들이 주를 이룬다.

같은 시간에 한데 불러놓고는 기약 없는 대기가 이어지는데 (때때로, 모델들 간 알 수 없는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함. 하하.)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내 차례가 되면 힐을 다시 고쳐 신고 컴카드(프로필 사진)를 챙겨 디자이너와 캐스팅 디렉터 그리고 다수의 스텝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Hi.”

“Where are you from?”

“Can you walk?”


짧은 인사를 나누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물음에 답한 후 Runway를 위한 워킹을 보여준다.


이때,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가 결정이 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냐면 캐스팅 디렉터로부터 You can go라는 말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에 따라 누군가는 집에 갈 준비를 또 다른 누군가는 의상 피팅을 위한 대기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모습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간혹, 피팅 대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기도 한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모두 하는 경우도 있음!)


모델을 시작한 초창기 그러니까 새싹모델 시절에는 

저 말이 꽤나 내 마음에 비수가 되어 여기저기 꽂히곤 했다. 

패션 인더스트리에서 유캔고라는 말은 명백하게 확실한, 거절의 다른 표현이었기 때문에.


운이 좋아 피팅을 하게 되더라도 그렇게 컨펌이 나더라도 쇼 당일 디자이너의 기분과 베뉴의 무드 등에 따라 내가 입은 착장이 필요 없어지면 언제든 유캔고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델이 되기 전엔 알지 못했다지. (응..당연함)


아무튼 당시엔 어린 마음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나의 무엇이 맘에 안 들었는지, 나는 모델로써 자격 미달인 건지 등등 오만가지 부정적인 생각에 스스로를 탓했고, 마치 방금 전 실연당한 사람 마냥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눈물을 흩뿌리던…. 그런 애처롭기 짝이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난 어렸고 여렸고 곧 잘 우울했다.


내가 떨어진 이유를 그들에게서 들을 수 없으니 나 자신을 탓해야만 했다.

그게 편했다. 그것이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꿀 수 있는, 보다 빠른 결과 값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모델 일에 대한 회의감과 자괴감, 선택받아야 한다는 압박감, 남과 나를 비교하는데에서 오는 자존감, 자신감의 하락 등등 온갖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점점 정신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것에 마음 쓰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

.

.

.







여전히,

해외 이곳저곳을 누비며 패션모델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나는



그때의 나를,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하고 싶다.


외국의 어느 길바닥에서 서럽게 울며 집으로 돌아가던 나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그냥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라고 토닥여주고 싶다.

어쩌면 진부 할 수도 있는 이 말들 끝에... 그냥 나를 꽉- 안아주고 싶다. 


그 시절의 열등감과 패배감 같은 것들은 깎이고 다듬어져 지금의 나를 완성시켰다.

절대적인 것 같던 그 말에 흔들려 내가 모델을 포기했다면 나는 과연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생각해 본다.




절대적인 것 같은 말들에 흔들리며 아파하는 청춘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윽고 위로해 주자 내가, 나를.




-

(당시 캐스팅 지에서 만났던 모델들은 여전히 모델 일을 하고 있을까...? 괜스레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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