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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오라 Oct 06. 2024

좋아하는 것은 잘하는 것을 이긴다.

생각의 전환

에피 2.

“좋아하는 것은 잘하는 것을 이긴다. “








어느 날, 우연히

추측하건대 엄마의 수첩에서 발견한 메모였다.

사용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수첩이었던 터라 단순히 집에 굴러다니는 여분의 수첩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찮게 내 눈에 띈 그 수첩을 무심히 집어 들어 훑어 넘기다, 엄마의 필체로 그것도 줄칸을 벗어나 대각선으로 아무렇게나 쓰여 있던 것을 보게 됐다.


이 문구가 언제, 어떤 마음으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한참을 곱씹어 읽었다.

그 당시 나는 패션모델로서의 자질과 한계에 대한 생각으로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발견한 엄마의 메모는 더욱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

6.25 전쟁 때 군인들의 군복을 재단하고 만들었던 친할아버지 그리고 건축학도였던 아빠의 영향을 받아 언니는 그림을 무척 잘 그렸고, 수석 합격 공무원이자 고향의 유지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남동생은 공부를 정말 잘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

이들 사이에서 나만 특출난 재주가 없었다.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은 언니와 공부머리를 물려받은 남동생 사이에서 난 특별히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 그저 그런 보통의 존재였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느끼며 자라왔고,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내가 17살이었던 그 해에 어떠한 계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막연하게 패션모델이란 꿈을 품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이 생긴 순간이었다.













나는 당장 그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곧장 엄마에게 압구정에 있는 모델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고, 긴 반대 끝에 고등학교 2학년 여름 하복을 입을 즈-음 비로소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과정을 거쳐 나는 필드에서 일하는 진짜 모델이 되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니 이제는 그 일을 잘하고 싶어졌다. 스타일리스트가 입혀준 옷의 무드를 기가 막히게 소화하고, 포토그래퍼의 디렉션을 정확하게 캐치해 내며, 이를 A컷 사진이란 결과물로 승화시키는 것 등은 단순히 이 일을 좋아한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무렵 나는 모델로서의 자질과 한계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고, 'born to be 모델' 그런데 이제 실력까지 좋은 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엄마의 메모는, 나를 위로해 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하는 것은 잘하는 것을 이긴다." 라니 이 어찌나 멋진 생각의 전환이란 말인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계속 좋아하다 보면 언젠가는 애초에 잘하는 것과 비슷한 경지 혹은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로 (내가 제멋대로 해석하자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잘하고 싶다'는 과도한 열망과 '잘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의해 좋아하는 마음이 점차 희미해져 갔던 것 같다. 게다가 스스로가 만족할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모델로서의 자질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고, 그것이 곧 나의 한계일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 내가 잘 해내지 못하는 것들에 좌절하며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은 너무 많고, 그중에서도 곱절로 뛰어난 사람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만약 그들을 따라잡으려 무조건적으로 잘하려고만 한다면 결국엔 내 페이스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

.

.

.

난 다시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됐든 간에 좋아하는 행위 그 자체를 좋아할 수는 없는 걸까 하고.. 또 무언가를 좋아하는 나 자신을 그 자체로 인정해 줄 수는 없는 걸까 하고, 그렇게 계속해서 좋아하다 보면 더 나아지는 순간이 분명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그러다 보면 애초에 잘하는 것을 이기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머지않아 결론을 내었다.














양 껏 좋아해 보기로. 그게 무엇이 됐든 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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