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맞네요. 협력된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하시면 됩니다."
의사 선생님은 짧고, 무미건조하게 말씀하셨다. 병원을 나와 걷는 내내 나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아서 멍하게 그냥 걷기만 했다. 함께 결과 들으러 갔던 큰 언니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언니! 나 회사 회식이라 가봐야 해.”
"이 상황에서 갈 수 있겠니?"
"다들 기다리고 있어서 가봐야 해."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언니와 헤어졌다.
통닭집으로 들어서자 동료들은 하나같이 나의 검사 결과를 물어봤다.
"당연히 괜찮으니깐 회식 왔지."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나는 평소처럼 시원한 소맥을 단숨에 들이켰다. 동료들은 안심하고 마시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술로 덮을 수 없을 정도로 착잡하고 무거웠다.
회사일에 주 2회 하던 방과 후 수업까지 빼곡히 채워졌던 일상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다들 나에게 이 참에 한 템포 쉬어가라고 말했다. 자기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고 너무 경솔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스스로 돌보지 않아서 벌을 받은 걸까 나는 쉬는 게 싫은데 바쁘게 사는 게 좋은데.'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날 이후로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게 되었다. 사실 아파서 힘든 것보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두려웠다. 넘쳐나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나는 뭘 할 때 행복한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이런 생각할 시간도 없었는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고민 끝에 다섯 가지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1. 겨울 한라산 등반하기
2. 식기세척기 사기
3. 책 50권 읽기
4. 대게 마음껏 먹어보기
5.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생일 때 현금 선물하기
이 중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얼마 전 경주 황리단길에 있는 '어서어서' 책방에서 산 것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책 제목이 '그런 의미에서'이다. 내 마음과 딱 어울려서 잘 읽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낯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아침마다 출근 준비로 정신없던 내가 요즘은 편한 옷에 책 한 권, 독서노트 넣은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선다. 걷다가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초록나무에 눈길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마음에 든 카페에 들어간다. 커피 마시며 책을 읽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독서 노트를 꺼낸다. 하늘빛 색 책 표지도 따라 그려보고, 걷다가 보았던 초록 나무를 그려보기도 한다. 초등학생 딸이 준 스티커도 붙이며 마무리해 보았다.
나에게 청천벽력 같았던 암선고가 꼭 나쁜 갓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난 혼자여도 충분히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그렇게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
오늘 저녁엔 가족들과 대게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이젠 더 이상 미루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내일도 나는 책 한 권과 독서노트 넣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