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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야 Oct 22. 2024

땅땅땅! 암선고

하지만 나쁘지 않아

 “유방암 맞네요. 협력된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하시면 됩니다."

 의사 선생님은 짧고, 무미건조하게 말씀하셨다. 병원을 나와 걷는 내내 나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아서 멍하게 그냥 걷기만 했다. 함께 결과 들으러 갔던 큰 언니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언니! 나 회사 회식이라 가봐야 .

"이 상황에서 갈 수 있겠니?"

"다들 기다리고 있어서 가봐야 해."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언니와 헤어졌다.


   통닭집으로 들어서자 동료들은 하나같이 나의 검사 결과를 물어봤다.

"당연히 괜찮으니깐 회식 왔지."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나는  평소처럼 시원한 소맥을 단숨에 들이켰다. 동료들은 안심하고 마시는 눈치였다. 하지만  마음은 술로 덮을 수 없을 정도로 착잡하고 무거웠다.


  회사일에 주 2회 하던 방과 후 수업까지  빼곡히 채워졌던  일상은 순식간에 졌다. 다들 나에게 이 참에 한 템포 쉬어가라고 말했다. 자기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고 너무 경솔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스스로 돌보지 않아서 벌을 받은 걸까 나는 쉬는 게 싫은데 바쁘게 사는 게 좋은데.'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날 이후로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게 되었다. 사실 아파서 힘든 것보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두려웠다. 넘쳐나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나는 뭘 할 때 행복한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이런 생각할 시간도 없었는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고민 끝에 다섯 가지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1. 겨울 한라산 등반하기

2. 식기세척기 사기

3. 책 50권 읽기

4. 대게 마음껏 먹어보기

5.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생일 때 현금 선물하기


  이 중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얼마 전 경주 황리단길에 있는 '어서어서' 책방에서 산 것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책 제목이 '그런 의미에서'이다. 내 마음과 딱 어울려서 잘 읽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낯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아침마다 출근 준비로 정신없던 내가 요즘은 편한 책 한 권, 독서노트 넣은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선다. 걷다가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초록나무에 눈길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마음에 든 카페에 들어간다. 커피 마시며 책을 읽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독서 노트를 꺼낸다. 하늘빛 색 책 표지도  따라 그려보고, 걷다가 보았던 초록 나무를 그려보기도 한다. 초등학생 딸이 스티커도 붙이며 마무리해 보았다.


 나에게 청천벽력 같았던 암선고가 꼭 나쁜 갓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난 혼자여도 충분히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그렇게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


  오늘 저녁엔 가족들과  대게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이젠 더 이상 미루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내일도 나는 책 한 권과  독서노트 넣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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