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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부파파 Nov 10. 2024

편지가 낯설어.

중경삼림 영화를 보고

따르르릉 따르르릉

"안녕하세요 아줌마 저 석용인데요.
주창이 있어요? 야! 이주창 구지난께로 나와 주은이도 나온데! 나이먹기 하자!!"


집에 하나씩 있던 선 전화기의 번호 튼을 7개나 꾹꾹 눌러야 했던 그 시절, 그렇게 들려오던 수화기 너머 오갔던 친구네 가족들의 목소리...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엄지 두 개로 이름 몇 자만 누르면 짜잔 번호가 뜨니까...


엄마가 친구 집에 전화할 땐, 이름 말하고, 안녕하세요 공손하게 인사하고, 친구 바꿔주세요 말하라고 신신당부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친구한테 직접 전화하면 되거든. 엄마, 아빠, 할머니 목소리 들을 필요가 없어졌어... 


친구네 집 전화번호는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주창이네는 7821, 주은이네는 6821, 우리 집은 9094...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내 스마트폰엔 몇 만개가 넘는 전화번호도 저장할 수 있거든 하지만 내 머리엔 10개 정도의 전화번호 밖에 저장할 수 없어...


"가족오락관 몇 대~ 몇!"
"정답은 아래 사서함 주소로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주말 저녁 먹고 나서는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 모여 앉아 있었어. 엄마, 아빠가 뉴스로 채널을 돌릴 때까지 말이야... 그러면 난 그때서야 누나랑 방에 들어가 놀곤 했었지...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스마트폰 작은 세상엔 이 세상 전부가 들어있는걸... 나만의 리모컨인걸...


우리 가족이 즐겨보던 가족오락관이라는 프로그램 품 받고 싶어서...

엽서에 보내는이, 받는이 주소를 쓰고, 정답을 적고, 눈에 띄게 형형색색 볼펜으로 정성껏 꾸미고, 내가 좋아하는 우표, 한 장 붙여 정성스레 우체통에 넣었었는데... 다음 주 방송 때 내 이름 화면에 뜨길 기대했었지...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1234 문자 한 통만 보내면 되는데 뭘...


"나이먹기, 깡통차기, 쥐불놀이 하자!구지난께로 나와!"


번번한 놀이터 없이, 왜 그리 불렸는지도 모를 구지난께 마을 공터에서, 깡통을 가져와서, 전봇대를 사이에 두고 놀곤 했었는데... 가끔은 형, 누나들과 위험한 모험도 즐기면서 말이야... 그러면서 우린 조금씩 조금씩 위대해져 갔었는데 말이지...

항상 내 손엔 모래가 잔뜩 묻어있어. 손을 씻으면 꾸정물이 나오고, 바지엔 늘 먼지가 묻어 있었지. 가끔은 도깨비풀 씨앗들도 붙어있어서 엄마한테 어디 갔다 왔냐고 추궁을 당하기도 했었는데...

더러운 모래가 아닌, 먼지가 날릴 필요가 없는, 푹신한 우레탄 바닥이 있는 놀이터, 멋들어진 미끄럼틀, 시소가 있는 놀이터가 우리집 앞엔 있지.

그런데 엄마, 아빠라는 감시자들도 함께 있어... 조금이라도 위험한 모험을 즐기고자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지. 우리 엄마, 아빠가 없다고 안심하지 마... 아파트 카페에 감시자들이 가끔 글도 올린단 말이야...


나는 어릴 때 고개를 숙이고 다닐만한 일이 별로 없었어. 항상 놀거리는 내 앞에 있었고, 아니면 머리 위에 있었거든.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고개 숙일 일밖에 없는 것 같아. 앞이나 위가 아닌 바로 내 눈 밑에, 내 손에 이 세상 전부가 있거든... 오죽했으면 횡단보도 앞 땅바닥에 신호등이 있어! 바닥에 빨간, 초록불 들어오는 것도 만들어놨던데... 이제 고개 숙일 일밖에 없는가 봐...




8 ,90년대 홍콩 영화를 참 좋아한다. 그중에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제일 좋아하고 자주 본다. 일 년에 적어도 5번 정도 보는 것 같은데, 어제 나는 또 중경삼림 영화를 다시 보았다. 스튜어디스 역의 주가령이 경찰 663 양조위에게 전달할 편지를 단골집에 주고 가는 장면이 유독 인상 깊게 느껴졌다. 다른 때 같으면 굳이 멈추어 다시 돌려 볼 일이 없었을 장면인데 말이다. 옛날 이별 통보도 편지로 했었구나, 연락이 안 되어 얼마나 답답했을까, 몇 날 며칠을 어찌 연락도 없이 연인들을 서로를 기다리고 만나고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현시대에 메신저 없는 연애가 가능은 한 걸까?


편리하지... 재미있지... 신기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지... 하지만

편리하고 재미있고 신기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그런 게 세상 전부는 아닐 텐데...

각자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 그러면 서로 더 애틋해질 수도 있을 텐데...


손편지를 써본지가 언제인가, 우체통에 정성을 담아 넣은 편지를, 우체부 아저씨는 언제 오는지, 혹시 주소를 잘못 쓴 건 아닌지, 반송되지는 않겠하는 걱정들을 한지가 언제인지...

휴양지에 가면 있는 느린 우체통 말고 우체통을 본적이 언제지... 우리 집 주변에 과연 어디에 우체통이 있을까? 하다 못해 공중전화도 찾기 힘든데...


간단한 손짓으로 몇 초만에 전달되는 신속 정확 사랑의 메시지가 아닌

한 땀 한 땀 수놓듯 힘들여, 정성껏 썼던 손글씨 편지, 며칠이 걸릴까 답장은 언제 올까... 잊어버렸다가 도착한 반가운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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