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 『이기적 유전자』 비판
이 독서록을 쓰는 데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했다. 종교와 과학이 가장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적으로 다루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 자체가 이 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본 글은 과학적 사실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강력한 도구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인간 삶의 선택과 가치에 대해 당위성을 제공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과학은 사실을 기술하고, 인과를 모델링하며,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력이 곧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규범적 권위로 전환될 수 있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인간은 삶의 선택과 의미 부여에 있어 과학적 사실을 참조하지만, 실제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실 위에 놓인 전제와 가치 판단이다. 이 점에서 사실은 종종 당위에 종속된다.
본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적 합리성이 인간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종적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암묵적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과학의 성과를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과 수행할 수 없는 역할을 구분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과학이 신적 권위로 전이되는 순간, 과학은 설명의 도구를 넘어 규범의 대체물로 기능하게 되며, 바로 그 지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 문제의식은 타자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필자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과학적 합리성은 인간 사고에 필수적인 기준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초월적 근거로 오인하는 순간, 오히려 사유의 자유와 논리적 정합성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데 있어 하나의 전제를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필자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며, 이 글은 그러한 전제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종교 자체가 과학을 부정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독교적 이념은 과학을 외부에서 반박하기보다, 과학이 자기 자신의 전제와 설명 방식을 질문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이 글 역시 그러한 작동 방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종교적 이념은 과학을 직접적으로 ‘격퇴’하는 도구가 아니라, 과학 내에서 과학을 다시 묻게 하고, 그 자기절대화를 내부에서 무력화하는 메타인지적 계기로 기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과학을 대체하거나 초월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스스로를 최종적 근거로 오인하는 지점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 쓰였다. 다시 말해, 종교는 단순한 신념 체계가 아니라, 사실 체계가 스스로를 신격화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식 구조의 상위 조건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특히 지식인 집단과 학위 보유자들의 담론 속에서 과학적 합리성은 때때로 오류 가능성을 유보한 채 거의 비가역적 권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보인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본 글에서는 가장 차가운 논리와 이성의 언어로 쓰였다고 평가받는 『이기적 유전자』를, 바로 그 냉소적인 ‘논리와 이성’의 내부에서 직접 해부해 보고자 한다.
맨 첫 장에서 도킨스는 모든 생명체가 원시 지구의 ‘유기물 수프’ 속에서 발생한 무작위적 화학 반응을 통해 염기 분자라는 정보체를 형성했고, 이들이 서로 간의 양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다양한 단백질적 도구를 장착해 진화해 왔다는 서사를 제시한다. 생명체가 공유하는 여러 공통점, 예컨대 mRNA의 코돈 삼염기 배열이 일관된 방식으로 단백질 합성과 대응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서사는 일정 부분 합당해 보이는 추측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문제 삼고 싶은 지점은 도킨스가 ‘우연성’과 ‘무작위성’을 호출하는 방식이다. 그의 설명에서 우연은 순수한 혼돈이라기보다, 전체 시스템 안에서 통계적 경향성이 성립한다는 전제를 이미 포함한 ‘합리적 우연성’으로 작동한다. 즉 도킨스가 말하는 자연은 무질서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합리성이 사후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규칙성과 경향성을 미리 가정한 자연이다.
여기서 나는 관찰된 범위에서 성립한 일반적 체계를 관찰 불가능한 범위로 확장하는 방식을 외삽(Extrapolation)이라 부르고자 한다. 외삽은 닫힌계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현상에 대한 귀납을 전제로 하며, 그 귀납이 충분히 안정적일 때에만 열린계로의 확장을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 특히 원시 수프 가설이 다루는 영역은 실험실에서 재현된 사례가 없고, 재현 가능한 닫힌계를 구성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도킨스는 관찰의 기반이 취약한 영역에서부터 출발해, 마치 이미 확립된 일반 법칙을 다루듯 외삽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그는 관찰 없는 귀납을 동원하면서, 동시에 귀납에 기대어 성립하는 외삽을 사용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논의는 외삽의 조건과 스스로 충돌한다.
더 엄밀히 말하면, 과학적 외삽은 귀납적 일반화에 기대고, 귀납적 일반화는 반복 가능한 관찰과 통계적 경향성에 기대며, 그 경향성은 다시 제한된 조건, 즉 닫힌계 혹은 통제된 조건에서의 재현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도킨스의 서두는 이 연쇄의 첫 고리인 재현 가능한 관찰이 결여된 곳에서 곧바로 마지막 고리인 자연 전반에 대한 설명으로 도약한다. 그 결과 ‘통계적 우연성’이라는 말은 자연의 속성을 가리키기보다 인간 인식의 합리성이 전제된 개념으로 기능하게 된다. 현재로써 그는 인간이 부여한 합리성을 품은 우연성을 하나의 절대적 설명 원리로 끌어올려, 마치 유물론적 조물주처럼 섬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도킨스는 우주를 설명할 때는 통계적 경향성에 따른 우연을 사실상 기정사실화하면서도, 생물체를 설명할 때는 자연 선택이라는 우열 관계, 즉 비교적 단단한 인과 구조 속에 가둔다. 그런데 통계적 우연성의 논리는 반례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반면, ‘절대적 인과’의 어조는 반례 가능성을 최소화하거나 배제하려는 경향을 띤다. 만약 우연을 통해 경향성을 설명한다면, 그 경향성은 언제나 예외를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인과를 통해 절대성을 주장한다면, 우연과 예외의 자리를 정교하게 한정해야 한다. 그러나 도킨스의 서술은 이 두 태도를 충분히 조율하지 않은 채 병치하고 있으며, 그 결과 ‘합리적 우연성’이 스스로의 부분집합, 즉 반례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모순으로 기울 수 있다. 통계학적 우연성과 인과적 절대성의 병치는 누가 들어도 긴장감을 느낄 만한 조합 아닐까?
리처드 도킨스는 『에덴의 강』에서 “3만 피트 상공의 문화 상대주의자는 위선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과학의 논리가 허무맹랑한 인문학과 달리 철저히 절대적 인과를 따른다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합리성’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인간의 인지 구조와 가치 판단에 의해 형성된 개념이라는 점을 그는 망각하는 듯하다. 형이상학에 대한 과학의 접근은 과학적 실증을 가능케 하는 암묵적 전제들, 즉 무엇이 측정 가능하며 무엇이 설명의 범주에 들어가는가를 건드릴 위험이 있고, 그 결과로 과학이 과학의 조건을 침범하는 자기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성경책을 들고 3만 피트 상공으로 올라가, 합리주의라는 범신에게서 다윈론이라는 언약을 받아 적고 있는 셈이다.
결국 도킨스의 ‘눈 먼 시계공’은 통계적 우연성 속에서 관찰되는 경향성마저도 우연의 누적으로 환원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통계적 경향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완전히 정교한 정의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자연의 사건이 본질적으로 단발적이고 고유하며, 그러한 사건들이 반복된다기보다는 축적될 뿐이라는 전제는 도킨스 자신의 진화 설명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 근거는 그가 진화를 설명할 때 일관되게 채택하는 설명 구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킨스에 따르면 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별 변이는 본질적으로 우연적이며,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각각의 변이는 매번 서로 다른 조건과 맥락 속에서 발생하고, 자연 선택은 이러한 변이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결과들을 사후적으로 선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자연 선택은 변이를 지시하거나 계획하지 않으며, 주어진 결과들 가운데 일부를 보존하고 다른 일부를 제거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후적 필터링이 누적된 뒤에야, 그 결과를 되돌아보며 일정한 방향성이나 경향성을 말하게 된다.
이러한 설명 구조를 그대로 따른다면, 우리가 말하는 ‘경향성’은 자연에 선험적으로 내재된 질서라기보다, 사후적으로 관찰된 결과들을 묶어 해석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개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경향성은 자연 그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설정한 해석의 틀에 가깝다. 이 점을 고려하면 ‘확률’과 ‘확증’, 그리고 ‘환원주의’ 역시 자연에 본래적으로 새겨진 성질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개별적이고 비반복적인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동원하는 인식의 도구일 가능성이 커진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도구들을 자연의 구조 자체를 온전히 포착한 것으로 간주한 채, 진분수 속에 자연을 가두려는 행위를 과학이라 부른다면, 그 과학은 지적인 겸손보다는 설명의 과잉, 혹은 오만에 가까워질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가 일관되게 전제하는 핵심 명제는, 생물의 형질적 특성이 유전자에 저장된 염기서열 정보에 의해 지시되고 발현되며, 그러한 유전자는 자연 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보존 혹은 제거된다는 주장이다. 이 관점에서 유전자는 자연 선택의 결과로 정제된 정보 단위이며, 복제자로서 독립적으로 증식하는 과정에서 유기체는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기능적 매개체로 작동하게 된다. 이로 인해 유전자는 설명상 ‘이기적’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이 설명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암묵적으로 요청된다. 그것은 자연 선택에 따르는 경향성 자체가 생물의 특성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경향성을 구현하거나 지시하는 주체가 유전자라는 가정이다.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자연 선택에 따르는 경향성 또한 생물의 특성이라면, 생물이 자연 선택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명령하는 특정 유전자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연 선택과 유전자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도킨스의 정의에 따르면 자연 선택은 하나의 과정 혹은 메커니즘이며, 유전자는 그 메커니즘에 의해 필터링되는 염기서열 정보에 불과하다. 이 정의를 그대로 따른다면, 생물이 자연 선택에 따르도록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유전자는 자연 선택의 조건에 의해 보존되거나 제거될 뿐, 자연 선택 그 자체를 실행하거나 명령하는 주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연 선택과 유전자는 개념적으로 분리되며, 두 요소 간의 관계는 단순한 인과적 종속으로 환원되기 어렵다. 따라서 유전자와 자연 선택 사이의 연관성은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문제로 남게 된다.
2-1. 후성 유전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볼 때, 유전자와 자연 선택 사이에 유기체가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후성 유전이다. 후성 유전이란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유전자 발현 양상이 조절되며, 그러한 조절 상태가 세포 분열 혹은 세대를 넘어 유지·전달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유전자 결정론적 설명에 일정한 긴장을 발생시키는데, 그 이유는 후성 유전의 작동 방식이 도킨스의 설명 구조와 완전히 정합적으로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모델에서는 유전자가 자연 선택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제되며, 그 결과로 유기체의 형질이 발현된다. 이 전제를 유지한다면, 후성 유전 역시 염기서열을 중심으로 한 자연 선택 기반의 적응 메커니즘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후성 유전은 단백질 복합체, 화학적 표지, 세포 환경과 같은 비염기서열적 요소를 통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 이 경우 형질 발현의 결정 요인은 특정 유전자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해당 유전자가 언제, 어떤 조건에서, 어느 정도로 발현되는가에 더 크게 의존하게 된다.
이 점에서 후성 유전은 유전자 자체뿐 아니라 유기체의 생리적 상태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형질 발현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조절 효과가 유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전자와 자연 선택 사이의 관계를 단방향적 종속 구조로 이해하는 설명은 수정될 여지를 갖게 된다.
물론 후성 유전을 유발하는 단백질과 조절 메커니즘 또한 궁극적으로 유전자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들어, 후성 유전을 유전자 결정론의 확장된 범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은 도킨스가 제시한 진화 모델의 핵심 구조와 긴장을 형성한다. 도킨스의 모델은 복제자의 임의적 변이, 생존 기계의 형질 발현, 그리고 자연 선택이라는 단계적 필터링 과정을 전제로 한다. 반면 후성 유전은 유기체가 환경으로부터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점에서, 변이가 순전히 임의적이라는 전제를 약화시킨다.
이 경우 변이는 무작위적 변화라기보다는 환경에 반응하는 조절적 변화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는 도킨스의 모델에서 사용되는 개념적 구분, 특히 임의적 변이와 선택의 이분법이 재검토되어야 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후성 유전은 유기체가 자연 선택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결과를 해석하고 조정하는 능동적 매개체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해석이 허용된다면, 유전자와 유기체 간의 관계는 더 이상 일방적인 종속 관계로만 기술되기 어렵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유전자는 유기체에게 자기 자신의 발현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설명상 설정된 ‘이기적 주체성’을 일정 부분 상실하게 된다.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개체라 하더라도, 유기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형질을 발현하는 방식에 따라 생존 가능성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생물의 삶의 주체를 유전자라는 단일 기준으로 환원하는 설명이 이론적으로 불완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2-2. 환원주의의 자기파괴
도킨스가 활용하는 과학적 환원주의는 적용 범위에 있어 유동적이다. 그는 때로는 설명의 범위를 확장하여 형이상학적 논의에 근접하고, 때로는 설명의 범위를 축소하여 하나의 근원적 원리로 다양한 현상을 포괄하려 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설명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 정합성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를 요구한다.
후성 유전은 이러한 환원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점검할 수 있는 사례로 기능한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후성 유전은 유기체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이기적 유전자가 유기체에게 일종의 조정 가능성을 허용하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도킨스가 호혜적 이타주의를 설명할 때 상위 메커니즘을 설정했던 것과 유사하게, 후성 유전을 포괄하는 또 다른 상위 설명 틀이 요청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곧 추가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후성 유전을 유발하는 물리적 혹은 화학적 메커니즘을 상위 단계에 설정할 경우, 해당 메커니즘과 유전자 사이의 관계 역시 다시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 선택과 유전자 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제기되었던 문제를 구조적으로 반복하는 셈이다. 즉, 어떤 메커니즘이 유전자 발현에 대해 우선적 지위를 갖는지, 그리고 그러한 우선성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비교·실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환원주의는 단순한 설명 전략을 넘어, 메커니즘 간 위계와 관계성을 규정하려는 시도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결국 환원주의 자체의 설명 범위를 넘어서는 요구를 생성한다. 다시 말해, 환원주의는 스스로의 전제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전제와 상위 개념을 호출하게 되며, 이는 설명의 폐쇄성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정 메커니즘을 결과 중심적으로 추출하여 보편적 설명 원리로 제시하는 방법론은 조건적 타당성만을 갖는다. 도킨스의 환원주의는 다수의 생물학적 현상을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그것이 모든 메커니즘을 포괄한다는 보장은 제공하지 않는다. 설명의 범위를 임의로 설정한 뒤 그 범위 안에서 모든 현상을 재배치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한계에 직면한다.
결정론이나 환원주의와 같은 개념이 종종 격언처럼 소비되는 이유 또한 이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환원주의는 세계를 인식 가능한 단위로 분해하려는 하나의 인식 전략이지만, 동시에 정의되지 않은 영역을 설명의 범위 밖으로 밀어내거나 축소함으로써 이해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방어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인간의 인식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가는 논쟁적이지만, 적어도 설명의 안정성을 요구하는 담론 속에서는 세계를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할하고, 그 틀 안에서 예외와 반례를 조정하는 방식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환원주의는 불확실한 영역을 관리 가능한 구조로 재편함으로써 설명의 완결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그 효용은 언제나 특정 조건과 전제에 의존하며, 절대적인 설명 원리로 기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생명체를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생존 기계로 규정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생물의 형질적 특성은 그것을 발현시키는 유전자의 진화 적합도에 의해 설명되며, 자연 선택은 이러한 적합도를 판별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즉 생명 현상 전반은 유전자 단위에서 작동하는 자연 선택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와 동시에 도킨스는 문화적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밈(meme)’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밈은 유전적 진화에서의 복제자인 유전자에 대응하는 문화적 복제자로 설정되며, 이를 통해 유전적 진화와는 구별되는 문화적 진화의 영역이 설명된다. 도킨스의 설명에 따르면 밈은 인간 사회에서 모방과 전달을 통해 증식하며, 유전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선택 압력을 받는다. 그러나 도킨스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전제, 즉 이기적 유전자가 생명체를 생존에 합리적인 기계로 형성한다는 관점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문화적 진화 또한 자연 선택으로부터 유래한 확장된 표현형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도킨스는 나아가 이러한 문화적 진화가 인간에게 유전자의 일방적 지시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때 문화적 진화는 인간의 유전적 특성에서 비롯된 능력으로 설명된다. 만약 그렇다면 문화적 진화는 유전자 단위의 자연 선택 과정의 연장선에 위치하게 된다. 이 전제를 수용할 경우, 문화적 진화가 유전자의 통제에 반역한다고 설명되는 순간 논의는 긴장을 형성하게 된다. 이는 유전적 자연 선택의 산물이 그 자체의 작동 원리에 저항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 구조는 생명의 모든 현상이 유전자 단위의 자연 선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초기 전제와 정합적으로 결합되기 어렵다. 모든 생물의 형질적 특성이 그것을 발현시키는 유전자에 의존한다면, 그 형질은 필연적으로 해당 유전자의 진화 적합도와 일정한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이 점에서 인간만이 문화적 진화를 통해 유전자에 대항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전제와 귀결 사이에 설명적 간극을 남긴다.
물론 문화적 진화가 우연성을 기반으로 발생하며, 유전적 진화와는 독립적인 메커니즘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 우연성은 문화적 진화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 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의 기원까지 확장될 위험을 내포한다. 이러한 확장은 과학 이론이 전제하는 실증적 인과의 범위를 벗어나, 설명을 형이상학적 우연성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과학적 설명과 형이상학적 추론 사이의 경계를 불명확하게 만든다.
또한 문화적 진화를 별도의 메커니즘으로 설정하는 순간, ‘생물체의 모든 특성은 자연 선택의 압력을 받은 유전적 형질에서 비롯되지만, 문화적 진화는 그와 독립적으로 작동한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그러나 이 명제는 자연 선택과 유전적 진화를 문화적 진화와 대립적인 위치에 놓는 결과를 낳는다. 이 경우 유전자가 왜 그러한 생존 전략, 즉 자기 자신을 제약하는 문화적 진화의 가능성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더욱 어려워진다.
사실 도킨스의 정의에 따르면 생명체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이며, 자연 선택은 유전자 단위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전제를 유지한다면 문화적 진화는 생명체의 연장선에 위치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유전적 진화와의 근본적 단절은 정합적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가 대립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두 과정 간의 관계적 모순을 자연 선택의 관점에서 해명할 뿐만 아니라, 양자의 우선성 혹은 위계를 과학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추가적인 과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는 자연 선택의 합리성과 인간의 합리성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부분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 즉 유전자가 문화적 진화라는 형질을 발현시킨 이유는 인간의 합리성 범주에서는 이해되기 어렵고, 자연의 비가시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인식 구조와 인식 대상에 대한 논의, 다시 말해 형이상학적 영역에 속하며, 과학적 실증의 범위를 넘어선다.
결과적으로 도킨스의 이론은 유전자의 자연 선택이라는 과학적 전제 위에서 출발하지만, 그 결론부에서는 유전자의 통제를 벗어난 문화적 진화의 자율성을 긍정한다. 이 자율성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 환원주의의 틀 안에서 충분히 정당화되기 어렵고, 오히려 그 환원주의적 전제와 긴장을 형성한다. 이 지점에서 문화적 진화는 도킨스의 이론을 확장하는 요소인 동시에, 그 이론의 내적 정합성을 시험하는 변수가 된다.
도킨스는 일관되게 형이상학을 과학적 설명의 영역에서 배제한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적 주장들이 실험적 검증이나 정량적 실증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이 관점에서 형이상학은 과학적 설명과는 구분되는 인간 인지의 산물이며, 과학이 다루는 현실적 인과 구조와는 거리를 둔 사유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도킨스가 제시하는 설명 구조 전체를 고려할 때 하나의 긴장을 내포한다. 도킨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연 선택은 생물학적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이며, 그 연장선에서 문화적 진화가 발생한다. 더 나아가 문화적 진화는 인간의 인지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되며, 형이상학적 사유는 이러한 인지적 변형의 산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설명을 그대로 따른다면, 형이상학은 자연 선택에서 출발한 진화 과정의 간접적 결과에 해당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자연 선택의 연장선으로 문화적 진화를 설정하고, 다시 그 연장선으로 형이상학을 위치시키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것으로 배제할 경우, 설명 구조는 자기 자신의 일부를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만약 형이상학을 배제하더라도 문화적 진화와 자연 선택은 여전히 유지된다고 주장한다면, 문화적 진화가 자연 선택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전제 자체가 약화된다. 이 경우 문화적 진화는 자연 선택과 단절된 독립적 영역으로 남게 되며, 그 설명은 도킨스가 비판해 온 형이상학적 추측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도킨스의 입장을 보다 제한적으로 해석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즉 그가 부정하는 대상은 문화적 진화 전체가 아니라, 문화적 진화의 부분집합으로서 형이상학이라는 특정 영역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추가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도킨스 자신이 지적하듯, 형이상학적 전제에 대한 신념은 집단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적 설명을 수용한다면, 형이상학은 자연 선택의 관점에서도 일정한 적응적 가치를 갖는 요소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형이상학이 인간 내면의 목표 의식이나 규범적 지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이에 대해 긍정적이지 못하게 평가하는 것은, 자연 선택에 기반한 설명과 긴장을 형성한다. 물론 이는 인간의 인문학적 합리성을 자연에 투사하자는 주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그러한 투사 행위 자체가 형이상학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도킨스의 자연과학적 판단은 스스로 설정한 경계 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밈이라는 개념의 설명적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내부에 포함된 형이상학적 사유를 일괄적으로 배제하는 태도는 설명의 정합성을 약화시킨다. 더 나아가 형이상학적 가치들 사이의 우열을 과학적 기준에 따라 판별하려는 시도 역시 문제를 야기한다. 형이상학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인식 구조와 경험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며, 이를 과학적 실용성이나 생존 효율성과 같은 척도로 평가하는 순간, 과학은 형이상학적 가치 판단을 수행하는 도구로 전환된다. 이는 과학이 스스로 초월하려 했던 영역을 다시 호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킨스의 형이상학 배제는 과학의 영역을 보호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동시에 과학의 설명 범위를 과도하게 확장함으로써 그 자체의 안정성을 위협할 가능성도 내포한다. 이는 도킨스의 유물론적 사고관이 갖는 설명적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도킨스의 주장을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형이상학이 과학의 영역에 침투하는 것을 경계하는 입장으로 재해석할 여지는 존재한다. 그러나 과학은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진리 체계로 규정할 수 없는 학문이다. 과학은 세계를 논리적 모델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항상 반례 가능성과 오류 가능성을 전제하며, 이러한 전제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 인간에게 유용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 점에서 과학 이론은 실험적 검증 여부와 무관하게, 반례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보다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은 형이상학적으로 보았을 때 유물론이라는 하나의 부분집합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유효성은 조건적이다. 이 조건을 벗어난 설명은 과학이라기보다 추론 혹은 가설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논증의 전제와 전개 방식 자체가, 과학적 유물론의 관점에서도 어색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 도킨스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증명될 수 없고 정량화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 선택이라는 과학 이론의 틀 안에서, 실험적 검증이 불가능하며 존재론적 지위조차 불명확한 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논의는 이미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이는 과학적 합리성과 형이상학 사이에 설정된 경계를 스스로 흐리게 만드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도킨스는 과학과 형이상학을 분리하려 시도하지만, 그 분리 행위 자체가 형이상학적 전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도킨스의 이론은 설명의 확장과 함께 그 적용 범위를 다시 성찰할 필요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