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도 충분한 애도가 필요해.
‘언니, 저 걔랑 아직도 연락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고.. 가끔씩 생각나면 연락해요. 2021년에 헤어졌는데..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 아이에 대한 여러 마음들이 모두 작아지긴 했어요.‘
그녀와 통화하다 보면 갑자기 충동적으로 솔직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오늘도 그랬다. 구남친과 아직도 연락하고 있었다니.. 얼핏 짐작은 했지만 지금까지 인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자신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연락하고 싶다고 하고, 그렇지만 이제는 그 마음도 많이 작아져 진짜 이별이 온 것 같다고 했다.
문득 내 예전 헤어짐이 생각났다. 2018년 5월 26일, 해운대 모래축제 마지막 날이었다. 타지에 살던 그와 낮 12시에 부산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의 해외 출장으로 두 달 만에 보게 된 나는 한껏 꾸민 다음, 나오기 직전 가슴을 크게 보이려 급히 브라 밑으로 뽕까지 집어넣고 나서는 길이었다. 뽕까지 장착하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완벽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그리움에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부여잡았다. 부산역에 도착해서 그를 보게 되었고, 환하게 웃는 내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날 1층 카페로 날 이끌었고 이내 이별을 고했다. 너무 아득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어제만 해도 보고 싶다고 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나는 그에게 처절히 매달렸다. 이럴 수 없고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달라고, 아니면 내가 이별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이럴 거면 왜 어제 같이 있던 네 친구와 날 왜 통화하게 했냐고, 너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왜 갑자기 이러냐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었고 얼마나 정신없이 매달렸는지 브라 속 뽕이 삐져나와 의자에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허나 그는 모질게 떠났다. 만나자마자 모래축제 가려고 했었는데, 내 마음이 모래가 되었다. 산산이 무너져 내린 마음을 붙잡고 나선 밖은 너무나 밝았고 따뜻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파란 하늘과 눈이 부신 햇살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무심하게 빛났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퇴근만 하면 문자로 매달렸다. 첫날밤도 매달리고, 둘째 날밤도 매달렸다. 그렇게 사흘 째 밤,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러자 그가 울었다. 난 지금도 그가 왜 울었는지 잘 모르겠다. 울고 싶은 건 나였는데.. 아무튼 그렇게 내 사랑이 끝났다. 단 3일 만이었다.
술 취한 어느 날, 불행히도 내 무의식은 그의 전화번호 열한 자리를 또렷이 기억해 냈고, 기어코 전화를 하고야 말았다. 그는 받지 않았다.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그 뒤로 누군가를 만나면 필사적으로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았고, 헤어지는 순간 그들의 연락처를 전화번호부에서 삭제를 했다. 내가 연락함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연락올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도 나처럼 비참한 경험을 할 여지를 주지 않는 내 배려(?)이기도 했다.
그동안 난 이별에 나름 잘 대처해 왔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헤어져도 차단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했고, 난 그녀들의 행태가 영화 속 여주인공이 되길 원하는 같잖은 마음상태를 누리고 싶어 하는 이기심과 연인이었던 이에게 배려도 없는 철없는 짓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 그녀의 고백을 듣자니 문득 이 생각이 드는 거다. ‘아.. 이별하는 중이구나. 그리고 곧 진짜 이별을 하겠구나.’ 그에 대한 여러 마음들이 작아졌다는 말에 그녀가 곧 이별에 도착할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그땐 정말 이별일 것이다.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내가 그와의 이별에 충분한 애도기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걸. 아직도 마음이 힘들 때면 그 사람은 내 꿈에 나와 내 마음을 괴롭게 했다. 얼마 전에도 헤어져 힘들어할 때도 내 꿈에 나오더니.. 내가 내 이별에 충분한 애도를 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일 만에 핸드폰 전원 꺼짐처럼 강제종료당한 나였기에 이별에 대한 충분한 애도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년째 이별 중이고 애도 중이다. 그러기에 여러 마음들이 작아져 그렇게 진짜 이별이 코앞에 온 것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내가 헤어질 때마다 필사 적으로 연락들을 차단한 것은 그들을 위함이 아니라, 철저히 날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너무 나약하니까 그들의 연락에 마음이 휘청거릴까 두려웠던 것이었던 것이다. 좀 휘청거리면 어때.. 계속 이별하면 되고 애도하면 되잖아.. 난 필사적으로 날 지켜왔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나약할 뿐이었고 지금도 매일이 2018년 5월 26일이다. 충분히 애도하면 27일이 오겠지. 그게 정말 날 지키는 일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