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그와트 레거시'를 하고
거금 68,000 원이나 주고 사버린 호그와트 레거시 엔딩을 어제 봤다. 연극 준비하고 일하느라 산 지 꽤 되었는데 못하고 있었는데 어제 몰아서 그냥 다 해버렸다. 공략 안 보고 하느라 머리 아프고 짜증났는데 오로지 아바다 케다브라 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플레이했다 (?)
나는 래번클로 기숙사였는데, 다른 이유는 없고 너무 그리핀도르와 슬리데린으로 압축되는 사람들의 선택들이 싫어서 홧김에 정한 거였다. 그리핀도르 너무 열정 넘치는 정의무새 맑눈광 같고 슬리데린은 온갖 차별주의자들이 모여 있는 인셀남 집합소 같아서. (ㅈㅅ 모두 그렇다는 게 아니고 창작물에서 내가 받은 인상이 그럼)
호그와트 레거시의 가장 큰 장점은 넓고 디테일한 맵과, 스토리를 미는 것 말고도 즐길 게 풍부한 서브 퀘스트와, 서사를 얹기 좋도록 잘 짜여진 세계관의 조각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학교 안에서만 돌아다녀도 할 게 왜 이리 많은지, 근제 호그스미드까지 가면 눈 돌아간다. 대부분의 여행은 후반부에 가면 플루가루를 통해 이동할 수 있지만, 빗자루를 타거나 히포그리프 하이윙을 타고 다니는 맛도 일품이다.
GTA만 해도 산악자전거 타고 새벽에 산 타는 게 좋고 스파이더맨 하면 웹스윙 만으로도 2시간을 보내는 나로서는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컨텐츠다. 게다가 액션이 훌륭하다. 그동안 해리포터 기반의 위자딩 월드 게임에서 조금 아쉬운 점(별로 게임 안 해봤지만서도)은 다양한 주문을 자연스럽고 화려하게 섞어 쓸 수 없다는 거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호그와트 레거시는 그 단점을 완벽하게 잊게 해준다.
특히 그나마 메인 스토리 중에서 제작진의 야망이 엿보였던 지점은 니암 피츠제럴드의 세번째 미션이었다. 스포라서 그냥 대단하다는 것만 말하려고. 렌더링이 죽여줌.
단점을 꼽자면 생각보다 메인 스토리가 재미가 없다. 그리고 어딘가 뇌절한 것만 같은 서브 퀘스트의 스토리들도 꽤 많다. 마법동물 구한다면서 교배장 만들어서 팔아치울 수 있게 만든 시스템도 좀 구림. 패트로누스도 동물의 형상을 띠고 애니마구스도 자신과 가장 잘 맞는 동물이 되는 것이라는 설정 다 좋은데 교배장 시스템이 좀 그래!!!! 액션이 좋다고 말했는데 결국 이런 류의 게임이 그렇듯, 메인 스토리가 끝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별 거 없다(그래도 스파이더맨 보다는 훨씬 많음). 또.. LGBTQ 캐릭터와 다양한 인종의 캐릭터를 삽입했지만 원작자가 그 조앤 롤링이니까 이 모든 게 소수자들 기만하는 것 같기도 함;
어쨌든 시스템적으로는 딱히 단점이라 할 만한 게 없다. 온라인이 되면 좋겠고 다양한 DLC가 나오면 구매할 용의가 있으며, 주문이 좀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게임의 여운이(스토리보다는 세계관, 위자딩 월드에 대한) 가시지 않아서 바로 신비한 동물사전과 그린델왈드?어쩌구의 범죄를 봤다. 신비한 동물사전을 본 기억은 나는데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이 게임을 하며 좀 기억 보정이 되었기 때문. 원래 재미있는 영화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2편을 보니 어김없이 노잼이었다는 것. 해리포터 세계관으로 유럽 여행 다니는 기분은 좋았는데 새벽 3시에 와인 마시면서 볼 만한 영화는 절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영화였나? 아무 생각 없이 봐서 그나마 나았던 것일 수도.
근데 게임하고 영화보면서 갑자기 이런 얘기로 넘어가는 것도 웃기긴 한데, 난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롤링이 제일 재밌게 구축한 건 '보가트'와 '디멘터', 그리고 '패트로누스' 마법인 것 같다.
보가트는 생물이다. 살기 위해 상대방의 불안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생명체인데, 이 생명체가 삶을 운용하는 방식도, 마법사가 그 생명체를 제압하는 방식도 재미있다. 보가트는 마법사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도 별다른 방어법이나 공격법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무의식적인 공포를 보여주곤 한다. 이게 너무 와닿는 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마음 속에 자신의 보가트를 품고 있다.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사람들은 벌벌 떨고 보가트가 마음껏 활개를 치도록 둔다. 공포, 불안감, 긴장감, 만성질환과 피로, 노이로제 등등. 우리 모두의 보가트들.
마법사들이 보가트에 대항하는 건 '리디큘러스'라는 마법인데, 이 주문을 외치면 보가트는 사용자가 생각하는 우스꽝스러운 형상으로 변한다. 스네이프 교수를 무서워하던 네빌 롱바텀은 자신의 할머니 옷을 입고 당황해하는 스네이프 교수로 만들어버렸고 거미를 무서워하던 론 위즐리는 거미의 발에 전부 롤러 스케이트를 신겨버렸다. 호그와트 레거시의 엔딩 즈음에 낫사이 오나의 보가트는 죽은 자신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죽고 말았다는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그는 보가트의 옷장에서 걸어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하지만 이내 멋지게 리디큘러스를 성공해낸다. 디멘터는 롤링이 생각하기에 좀 더 직접적으로 본인의 불안이나 우울감을 투영한 생물 같다.
보가트는 일상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불안과 공포를 포괄한다면 어쩐지 디멘터는 좀 더 절대적인 느낌이 든다. 디멘터는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행복과 즐거웠던 기억을 훔치고 종국에는 감정 자체를 소거해버린다고 하니 보가트보다는 훨씬 더 위험한 생물이긴 한데, 인간의 불안은 어쩌면 보가트보다는 디멘터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이 드네. 가장 취약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다. 기쁨에도 기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울하고 혼자 남겨져도 괜찮다고 여기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전부 밀어내는 사람들, 홀로 서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나 어김없이 외로움으로 빠져드는 사람들. 디멘터랑 쭈압.
부모가 살인자에게 살해 당했고 사랑받지 못하던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해리 포터의 보가트가 디멘터라는 점도 재미있다. 해리 포터는 괜찮다며 자신을 속인 적이 있었나? 어린 마음에 이입해서 보느라 그냥 해리포터에게 가스라이팅 당했던 지난 몇 년 동안 해리포터가 극심한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디멘터를 보고 아무리 두려움에 떨어도 기절까지는 하지 않는데 해리 포터는 기절을 몇 번이나 하는 걸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행복한 기억을 끌어내어 어떻게든 구현해야 하는 패트로누스 마법을 해리 포터가 어떻게 쓸 수 있었나? 결국 이 안타까운 젊은 정신 질환자의 곁에는 건강한 론과 헤르미온느라는 친구가 있었기에...
론네 집 분위기를 보면 건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헤르미온느는 게다가 머글임에도 마법사 사회에서 자신의 의견 개진하며 살아가는 멋진 시스젠더 여성임. 높은 자존감은 본인 스스로의 능력도 능력이겠지만 그의 부모가 아이를 얼마나 존재로 사랑해줬으면 저렇게 당차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까.. 골칫덩이이자 사회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인물 혹은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 소년을 온갖 죽음을 먹는 자들이 왜 가까이 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는 게 너무 본인들 서사와 맞기 때문이지. 빌런들 대부분 서사가 불운하다. 볼드모트야 당연하고 호그와트 레거시의 란록도 고블린으로서 소수자의 대표성을 갖고 적폐 마법사 사회에 반기를 든 래디컬일 뿐이다. 누군가 란록도 사랑으로 감싸줬다면 달라졌을텐데. 물론 그런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들의 책임을 선량하지만 무심한 개인들에게 돌리려는 건 아니지만, 서사에서 대부분 그런 인물을 악으로만 표현하고 제거하는 것이 서사의 종결로 마무리되니 좀 아쉬울 뿐이다.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보가트나 디멘터 등등 이런 인간의 공포를 이끌어내는 존재들이 어디까지나 전부 생물이라는 점, 대항자의 자존감과 행복도에 따라 이를 물리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좋았다. 위자딩 월드 시리즈에서 우리가 반드시 얻고 가야할 것은 다른 것보다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고 동시에 그런 것들을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이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가는 것 아닐까 싶어.
불안함이 화두인 요즘 내 세상. 관계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전부 불안함 투성이인 채로 살아왔으나 사실 삶이 그렇다. 빗자루 타고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면 그 빗자루 타다가 만나는 트롤과의 다툼도 좋아할 수밖에 없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