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한 세계에서
따뜻한 숨이 차갑게 식었다.
차가운 숨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깊은숨이 생의 무게를 안고 내려앉았다.
무거운 숨이 토막 났다.
토막 숨이 도르래를 돌다 한숨이 되었다.
한숨이 지쳐 옅은 숨을 가릉거렸다.
가늘게, 가늘게, 가늘게
더 가늘어질 수 없을 때까지 가늘게
가지가지의 숨이 쉬지 못하고
쉬었다.
들숨과
날숨이
쉬지 않고, 쉬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루다는 그렇게 쉬지 않고 쉬는 숨의 일이 자꾸만 의식되어 불안했다. 처음 안도의 숨을 쉰 건 갑자기 모든 감각이 느껴졌을 때였다. 아주 먼 데서, 달려오는 발소리들, 루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조금씩 크게 가까이서 울리듯 들렸다. 페르의 따스한 살이 맞닿는 느낌과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의 느낌과 그러쥔 손안에 들어온 옷자락의 느낌이 점점 또렷해졌다. 이불에서 나는 좋은 향이 갑자기 콧속으로 훅 들어오고, 어느덧 눈에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보였다. 살아서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이 오롯이 전해졌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살아서 좋았다.
그러다 살아서 좋은 게 문득, 두려워졌다.
“루다야. 이제 내려가자. 디오가 아침 다 했대. 자, 내가 부축해 줄 테니 여기 잡아. 좀 전에 잠깐 내려갔다 왔는데 냄새가 죽여줘. 먹어야 기운이 나지! 루다, 넌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24시간 철통 경호한다!”
다정하게 루다의 팔을 잡아 일으키는 백구의 손이 느껴졌다.
“그만 내려가지.”
루다가 일어서는 모습을 확인하고서 돌아서는 페르의 모습이 보였다.
“루다! 조심해서 내려와! 천천히~천천히~ 거기 마지막 계단은 높이가 좀 낮으니까 조심하고.”
살뜰하고 세심한 디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순간, 그들 곁에 있어서 좋았다.
차분한 연두색 벽에 크림색 가구와 나무로 빚은 도구가 가지런히 정렬된 주방은 똑 떼어서 너른 들판에 갖다 놔도 어울릴 만큼 자연적인 분위기였다.
“디오야, 주방이 너무 아름답다. 작은 온실 같아.”
창가는 물론 벽 선반, 그릇장 사이사이와 식탁 위에도 작은 허브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기분 좋은 시원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그렇지? 루다야, 여기는 내 공간이야. 하나하나 다 내가 고르고 가꿨어. 이렇게 식물과 함께 호흡해야 건강한 정신, 건강한 몸을 만들 수 있댔어.”
디오가 자랑스레 말하며 음식을 접시에 담았다.
“그러게! 여기 딱! 들어오니까 공기가 완전 달라. 같은 집인데 어쩜 이리 다르냐. 저어기 저 건너는 아주 음침하고 어둡고 기운이 막 꺼지는 거 같은데. 신선해! 아주 신선해!”
디오를 도와 접시를 나르며 백구가 괜히 응접실 분위기를 탓했다. 페르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커피를 내렸다. 루다는 수저 세트를 각 자리에 놓고 백구가 나른 음식을 개인 접시에 담아 놓았다.
“우와! 디오오옹! 이게 다 뭐야? 엄청 맛있겠다!”
“인헤니가 그러는데 다른 뿌리끼리 어울려 살아도 자기 뿌리를 잊으면 안 된댔어. 이건 쌀로 만든 밥, 이건 무와 고기가 들어간 뭇국, 이건 소로 만든 불고기, 그리고 이건 화전이야. 루다랑 백구의 조상들이 먹던 음식이야. 나도 레시피 보고 처음 해 본 거라 맛이 있을지 모르겠어.”
디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구가 고기를 입에 가득 밀어 넣으며 엄지를 세웠다. 루다도 국물부터 맛봤다. 달근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속을 뜨끈하게 덥혀주었다. 달짝지근한 고기는 생각보다 부드러운 식감이었는데, 씹을수록 풍미가 배어 나와 신기했다. 작은 꽃잎이 곱게 장식된 화전은 쫀독쫀독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디오가 내온 음식은 음식에는 정성과 마음이 들어 있었다. 단백질 덩어리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정성이었다.
“디오야. 정성과 사랑을 먹는 기분이야. 음식을 먹으며 이렇게 따뜻한 기분이 들 수 있다니. 네가 아니면 몰랐을 거야. 고마워. 그런데 디오는 잘하는 게 정말 많은 것 같아. 청소도, 요리도, 가꾸는 것도, 그리고 마음도 넓고 잘 헤아려 주어서. 곁에 있으면 본받고 싶어 져.”
루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백구가 음식을 빨리 삼키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상해. 분명 첨에 디오가 힘이 세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나한테 막 쟤 조심하라고 페르가 겁줬거든? 루다야? 근데 디오가 힘쓰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분명 몸은 저렇게 크고 근육질인 데다가 어깨도 딱 벌어지고 손도 커다래 가지고, 젤 잘하는 건 요리야. 진짜 싸움 잘하는 거 맞아? 아니, 이건 진짜 중요한 문제야. 물론 나 혼자서도 우리 루다 못 건들게 충분히 다 쳐낼 수 있지만! 방어선이 있어야지 방어선.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백구. 넌 입만 다물면 꽤, 괜찮아 보이는데. 좀 진지할 수 없나.”
페르가 동문서답으로 응하자
“난 충분히 진지해.”라며 백구가 페르를 쏘아보았다.
둘의 팽팽한 기운을 뚫고 디오가 천천히, 지금까지 본 중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두 가지 임무가 있어. 그중 하나가 전투야.”
“전투?” 루다와 백구가 동시에 물었다.
“응.”
“디오는 인헤니가 내게 선물해 주었지. 한 2년 되었나. 경호가 이유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대외적인 거였어. 싸움을 잘하는 건 맞아. 그런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몸싸움이 아니지. 백구, 혹시 그 게임 하고 싶나?”
“응?”
“네가 부러워서 몸 둘 바를 몰라했다는 그 게임.”
“아하하……. 내가 언제 부러워했다고 그래. 그냥 난 수학을 좋아했다고. 얘가 또 참… 사람을 잡네.”
백구가 오리발을 내밀었다.
“무슨 게임?”
“아하하……. 루다야. 있어. 그 애들 하는 게임. 허세 가득한 애들이 하는 그런 거.”
백구가 손사래를 치거나 말거나 페르는 계속 질문했다.
“게임 배경 본 적 있나.”
“…….”
“없겠지. 파트리아는 모든 공간이 계획된 곳이지. 설계자가 누군지는 정확지 않지만. 재건할 때부터 계획이 있었다고 생각해. 물론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에 도달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지.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할 수 있지.”
“뭔 소린지 알아듣게 말해.”
“첫 게임 공간은 ‘안식의 집’ 내부와 똑같아. 게이머의 적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지. 물론 게이머는 신나게 게임을 할 뿐이야. 게이머가 버튼을 조작하면 중앙 시스템을 통해 들어간 명령이 ‘안식의 집’ 곳곳에 설치된 기계나 가구에 설치된 구멍을 통해 발사돼. 그곳에 있는 모든 도구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 물론 스펙터클하게 전체를 폭파할 수도 있지. 조용하게 가스를 뿌릴 수도 있고.”
루다와 백구의 얼굴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색이 되었다. 디오는 숟가락을 내려놓은 루다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안절부절못했다.
“아니이. 우리 루다 먹지도 못하게 그런 얘길 왜 해.”
“알아야 할 거 아냐.”
“그게 꼭 지금이어야 하냐구우.”
“디오, 시간이 지금뿐이라면?”
페르의 말에 디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디오는 게임에 접속해서 게이머를 없애거나 적어도 퇴장시키는 게 임무야. 디오처럼 그런 전투 임무를 받은 인공 인간이나 사람들이 있지.”
“말도 안 돼. 그건 그냥 가상공간일 뿐이잖아. 그게 어떻게…….”
“그래. 게이머에게는 가상공간이지. 하지만 알고 보면 간단해. 게이머가 누른다, 중앙 시스템이 인식해서 명령어를 입력한다, 네트워크가 연결된 기기들이 작동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비공식적으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걸로 알아. ‘안식의 집’에 어떤 이들이 가지?”
알았지만, 차마 모두들 대답할 수 없었다.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지. 피부가 늙기 시작하는 사람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눈엣가시 짓을 하는 사람들, 위험한 사람들이 가는 곳. 그곳이 얼마나 크다고 생각해? 그 많은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있을까?”
“그럼, 게임 속 장면이 전부 일어난다는 거야?”
백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지금은 그곳 한정이지. 하지만 언젠가 전부가 될 수도 있겠지. 모든 공간에 설치되었으니까.”
루다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말없이 그곳으로 떠나셨어도, 연락 한번 하지 않으셔도, 막연히 계시리라 생각했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백구가 소리쳤다.
“야! 그걸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해? 루다 오늘, 충분히 힘들어! 왜 애를!”
“그 정도로 힘들 거면 나서지 말란 경고야. 괴롭고 힘들어서 울기나 할 거면, 파키오로 가서 안락하게 살아. 나 말고도 남자는 많아. 우리와 함께한다면 더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울 거야. 정말로 죽을 수도 있지. 무섭다면 얘기해.”
페르는 표정도, 목소리도, 한기가 느껴질 만큼 냉랭했다.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어?”
루다가 물었다.
“가루가 되어 우주로 날아갔지…….”
언제나 단칼 같은 페르가 말끝을 흐리며 눈을 감았다. 백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 손으로 벽을 내리쳤고 디오는 고개를 떨구었다. 오직 루다만 고요했다.
루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물을 닦았다. 닦고 또 닦고 또 닦았다. 말끔하게.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조금은 알겠어.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가실 때 내가 파트리아에서 임종을 지킨 첫 사람이라고, 이건 기뻐할 일이라고 하셨어. 그리고 또 할아버지는 인간답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하셨어. 우리 할아버지는 흙으로 돌아가셨거든. 아주 깊은 곳에서. 나는 볼 수 없었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루다가 말을 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할아버지가 내게 처음 가르쳐 주신 문장이야.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살고 자유롭게 마지막을 선택할 권리. 우리는 인간이지만 자유를 잃었어. 그러니까 다시 찾아야지. 자기 의지대로 사는 인간의 삶을. 가족이 함께 살고, 마지막을 함께하고, 모두가 임종을 지킬 수 있게 해야지. 그러니까 백구야, 이제 그만 여기 와서 앉아. 아프잖아. 백구야. 너도 나랑 같이 가자. 응?”
그러면서 루다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