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한여름과 작별하는 바람이, 불었다. 별안간 돌풍을 일으켰다 멀어졌다 돌아왔다 다시 떠나길 반복하는 궂은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 땅끝까지 빼곡히 심어진 벼들은 휩쓸리며, 물결을 만들며, 내내 울었다. 벼들의 울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어지다 바람 소리에 스며들어 공전했다.
붉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나부끼며 심란하게 엉켰다. 초록 물결 사이에 선 붉은 머릿결이 유독 독하게 빛나는 날이었다. 인헤니는 인공 사병을 끌고 온 새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었다. 사병들은 새턴과 인헤니를 에워싸고 방사형으로 논두렁길을 짓밟고 석상처럼 서 있었다.
“새턴. 이러지 마.”
“당신이야말로 이러지 마. 내가 페르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번번이 내가 보낸 애들이 빈손으로 올 때마다 재미있었어? 아주 거기서 눌러살라고 식량까지 살뜰히 챙겨 보내 주고!”
“입이 까다로운 애잖아. 탈이라도 날까 봐 그랬지. 굶게 할 순 없잖아.”
“당신이야? 당신이 페르를 보낸 거야? 페르한테 그렇게 가르쳤어? 날 배신하라고?”
“새턴, 진정해.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새턴에게 인헤니가 한 걸음 다가갈 때였다. 레오가 인헤니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만류했다. 지금 새턴을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식량을 빌미로 둘은 연락한 거잖아! 내가 지금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알면서, 데려오기는커녕 내게 한마디 언질도 안 했는데, 내가 어떻게 믿어?”
“새턴, 장담컨대 페르와 직접 연락한 적은 없어. 디오가 메시지를 보냈고, 물건만 보내줬어.”
“그리고, …계속 바빴어. 당신도 알잖아. 밀 수확이 끝나는 대로 여기로 왔어. 이곳 관리인들이 이제 제법 잘하기는 하지만 수확할 때까지는 내가 함께해야 해. 그래서 당신을 보러 갈 수 없었던 거야.”
인헤니의 말에 새턴이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었다. 바람 소리보다 크고, 울음소리보다 슬픈 웃음이었다.
“흐응. 그래서 내게 말할 수 없었단 거야? 당신에게 난 잡초만도 못 한 존재지. 당신은 비겁해. 논밭 속에 숨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 날 혐오하면서도 떠나지 못해서 여기 처박혀 있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니야, 새턴! 내 말 들어!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냥 난 당신이 하는 일을 함께할 수가 없었어……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
“함께 살러 왔는데, 함께 할 수 없다. … 그래, 이해해. 그런데 혹시 너무 오래되어서 잊었어? 여기 땅을 산 돈도, 이 빌어먹을 곳을 굴리느라 들어간 돈도, 결국엔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일을 해서 번 돈이라는 거.”
“여보…세요? YO? 제 말 들려요? 아…아니다, 저 보이세요?”
새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화상 통화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화면으로 달라진 모습을 그에게 보여 준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긴장되었다. YO는 그런 새턴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물론이지요. 새턴, 잘 보여요. 적응은 잘하고 있어요?”
“네. 덕분에 잘 왔어요. 우리가 타고 온 비행선이 파키오로 오는 마지막 선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YO. 지구에 남았다고 상상하면 너무나 끔찍해요. 정말 고마워요.”
“네. 잘되었어요. 마침 취소한 두 자리가 났는데, 인헤니와 당신이 떠오르더군요. 자, 그럼 무슨 문제가 있으실까요?”
“네?”
아직 여물지 않은 새턴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그냥 안부 인사는 아닐 테고, 불편한 게 있나요?”
“아…. 다른 게 아니라요. 인헤니랑 저랑 전 재산을 걸고 왔잖아요. 여윳돈을 가져오긴 했는데 여기 파킷으로 환전하니, 너무 적더라고요. 집도 깔끔하고 영원히 건강하게 살 수 있어서 너무 좋은데, 먼저 온 분들에게 들으니 식사하는 것처럼, 충전하는 유지비랑 업데이트비, 새로운 버전 구입 비용, 이런 데 돈을 내야 한다고 해서요.”
새턴이 조심스레 확인하듯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제가 설명 안 드렸던가요? 새턴. 거주지를 옮기고, 아프거나 죽지 않는 인공 몸을 얻은 것 말고 변한 건 없어요. 살아가는 데는 거기도 돈이 들어요. 그러니까 돈이 모자랄 것 같으면 벌어야죠.”
“미안해요. YO. 인헤니와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말에 너무 들떠서 제대로 못 들었나 봐요. 일자리는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혹시 …아시나요?”
이때만 해도 새턴은 정말이지, 숙맥이었다. YO의 말에 초조하고 불안한 티가 역력히 났다.
“걱정 말아요. 새턴. 지금 몸의 피부는 어떤가요? 인공이라 질기고 탄력도 좋긴 할 텐데, 조금… 뭐랄까요.”
“네. 정말 좋긴 해요. 근데 아무래도 기계 같은 느낌은 있어요. 조금 그래요.”
“네. 그럴 거예요. 그래서 여기 연구소에서도 대체할 수 있는 걸 찾아 연구하고 있어요. 굉장히 혁신적인 아이템이에요.”
약간 주저하는 YO에게 눈치 빠른 새턴이 애원하듯 말했다.
“있지요. YO. 말해 주세요. 우린 간절해요. 여기까지 왔는데, 인헤니에게 꼭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하하. 새턴. 당신은 정말 입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음. 이건 아직 아무도 알면 안 돼요. 약속할 수 있어요?”
“네, 당연하죠.”
“좋아요. 지구에 남은 사람 중에서 신청자를 받아 임상에 성공했어요. 그들의 스킨을 스캔하는 거지요. 마치 모양틀에 찍어 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약간의 가공을 하면 파키오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팔 수 있죠. 당신이 팔아보겠어요?”
처음에 새턴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수습했다. 머리 회전이 빨랐기에, 그가 내려준 동아줄을 꽉 잡아야 한다는 걸 바로 알았다.
“그러면, 독점인가요? 당신이 생산해 준 걸 사려면 얼마나 내야 할까요?”
YO가 빙그레 웃었다.
“새턴, 알겠지만, 나는 장사꾼은 아니에요. 인류의 미래에 이바지하는 걸로 족합니다. 그냥 가져다 파세요. 단, 모든 거래는 메디움에서 해야 하니 상점을 사거나 하는 그 정도는 당신이 해결해야겠지요. 아, 그리고 처음엔 소량이라서 당신에게 우선권을 주겠지만, 대량생산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판매권을 줄 거예요.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야잖아요.”
“좋아요.”
“좋아요.”
그렇게 번 첫 수익으로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새턴이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인헤니가 지구에서 가져온 씨앗을 뿌릴 땅을 사는 것이었다.
새턴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얼마나 애지중지 돌봤는지 벼들은 하나같이 반들반들했다. 반면 그의 스킨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푸석푸석했다. 새로 심지 않아 듬성듬성해진 머리카락은 빗자루로도 쓰지 못할 정도였다. 늙지 않는 몸이 늙어 보였다.
“인헤니에로. 이제 당신 차례야. 날 위해 하나쯤은 해야지.”
“그래. 그래, 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
“페르디다와 루다를 데리고 와. 당신이 직접 가서 데리고 와. 당신도 알잖아. 나는 여길 비울 수 없어. 설령 간다 해도 페르가 순순히 날 따라올 리 만무하잖아. 하지만, 당신이라면, 따라올 거야.”
새턴은 인헤니가 답할 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거절하거나 기한 내에 페르를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당신이 사랑하는 여기는 사라질 거야. 저기 보이지? 하나씩 들고 있는 거. 저 구멍에서 아주 앙증맞은 불씨들이 나올 거야. 땅에 대고 탕! 여기뿐만 아니야. 당신 손길이 닿은 모든 곳에, 내 사병들을 보냈어. 이 지긋지긋한 것들을 훨훨 태워버릴 거야. 하지만, 당신이 페르를 데리고 온다면, 당신을 믿고 이곳으로 다시 보내 줄게.”
새턴이 말을 이어갈수록 인헤니의 얼굴을 찬바람이 움켜쥐었다. 말 때문인지, 바람 때문이지 그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다.
“새턴, 지금… 지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아?”
“물론이야. 오늘, 바람이 참 좋네. 불씨가 너울춤을 출 날씨야. 이 일로 당신이 영원히 날 용서하지 않아도 감행할 거야. 몰랐다면 모르지만, 알면서 어떻게 포기해. 생명이 돈이고, 돈이 곧 생명이야. 루다가 아기만 낳아주면, 다음 선거에서 우리가 위원장이 될 수 있어.”
인헤니가 한 걸음 뒷걸음치며, 물기 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당신이 이곳에서 바라던 삶이야?”
“맞아!”
“새턴, 이해가 안 돼. 그게 무슨 소용이야? 루다와 루다의 아기가 위타의 피를 이어받아 늙지 않는다 해도, 그건 루다의 신화이지 당신의 신화가 아니야. 당신이 얻을 게 없어.”
“모든 신화는 누군가 만든 거야. 그 아기는 나와 당신의 아기가 될 거야. 신성한 아기의 지장을 우리가 파는 스킨에 찍어주면, 그 자체로 라벨이 될 거야. 다른 업체들은 따라올 수 없는 차별화 전략이야. 여기서 살아간다는 건 계속 돈이 필요하단 얘기야. 돈이 없으면 충전을 못해. 당신이 그토록 아끼는 흙도 만질 수 없지.”
인헤니가 한 발작 더 뒤로 물러났다. 어쩌면 바람이 뒤로 밀어내는지도 몰랐다. 인헤니는 떠밀리듯 자꾸만 뒤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