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3] 17 파트리아의 미래는, 없어
파멸한 세계에서
“자! 인헤니가 수확한 밀로 만든 디오표 특제 와플! 고소한 맛이 일품인, 다른 데선 절대 맛볼 수 없는, 한번 먹으면 또 먹고 싶다는 바로 그 디오표 와플, 얼른 먹어봐. 루다야.”
때마침 디오가 복도 건너편 주방에서부터 춤을 추듯 스텝을 밟으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다부진 팔뚝에 접시를 실어 사뿐히 건너오는 모습만으로도 응접실의 공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게다가 그가 주조한 리듬이 귀에 착 감긴 탓에, 먹기도 전에 군침이 싹 돌아 모두의 이목이 디오의 팔뚝에 쏠렸다.
디오는 제일 먼저 루다의 개인 테이블에 가장 예쁘게 플레이팅 한 접시를 올려놓고 백구에게는 가장 많이 든 접시를, 페르에게는 한 개 덩그러니 있는 접시를 주며 말했다.
“자, 많이들 먹어~. 아마 오늘을 평생 기억하게 될 거야!”
디오가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루다와 백구가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디오, 이거 진짜 맛있다. 캡슐이나 간편식이랑 비교도 할 수 없어. 파키오에서 자라는 사람은 다들 이렇게 먹어? 속은 부드러운데 겉은 적당히 바삭하고, 입안에는 달콤한 향이 남아 있어.”
디오가 좋아할 말만 쏙쏙 골라 부드러운 미소에 버무려 내어 주는 백구의 칭찬에 이어
“디오야.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 봐. 네 말처럼 오늘은 평생 기억될 날이야. 이 순간을 꼭 기억할게.”
차분하지만 진심을 담은 루다의 칭찬이 이어지자 백구는 벙싯벙싯 웃음이 났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감정 회로를 지배하여, 이윽고 흠뻑 취할 때쯤이었다.
“너희들이 음식다운 음식을 못 먹어 봐서 그래. 이건 좀 다네. 그리고 좀 더 탱탱해야 하는데, 벌써 눅눅하군.”
페르가 찬물을 끼얹었다.
“디오! 너 여기로 붙어라. 쟤는 첨 말하는 본새를 봤을 때부터, 딱 별로였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질 놈이야.”
“백구, 그럼 나 월급 줄 수 있어?”
“얼만데?”
“삼백 파킷.”
“삼..삼백 파..킷?”
“응! 그런데 너처럼 좀 많이 먹고, 따라다니며 많이 챙겨줘야 하는 상황이라면 좀 더 받아야 하지만, 삼백 파킷만 받을게.”
“디…디…디오. 내 생각엔 페르는 겉은 재수 없지만 속은 따뜻한 남자인 것 같아. 그리고 사실은 그게 최고인 거다? 고용주는 다 필요 없어. 돈만 따박따박 잘 주면 되는 거야. 너 복 정말 받았다. 잘해 드려. 삼백 파킷이나 주는 고용주님께 달랑 와플 한 개가 뭐냐. 너 그럼 안 된다.”
페르 칭찬으로 시작해 디오를 타박하는 것으로 말을 끝맺으며 백구가 페르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남자가 너무 말 많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헤프게 웃으면 좀 가벼워 보이더군.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디오도 너 돈 없는 거 알아.”
페르는 자유자재로 표정을 바꾸는 백구가 볼 때마다 꼴사나웠다.
“너야말로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그 똥폼 잡는 거 관심받고 싶어서잖아. 거 보통 애들이 뛰다가 넘어지면 울거든? 그러면서 주변 눈치를 쓱 봐요. 관심 가져 주면 본격적으로 울어. 근데 딱 넘어졌는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잖아? 그럼 아무렇지 않은 척 툴툴 털고 일어나서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무심한 척하거든. 그게 너야. 괜히 바람 쌩쌩 불면서 사랑받지 못한 티 팍팍 내는!”
“이봐! 백구. 철없는 척, 사람 좋은 척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 하얀 종이 뒷면이 하얄 거라는 법은 없지. 까보지 않고서야 모르는 거 아닌가.”
“뭐, 적어도 겁쟁이는 아냐. 누구처럼.”
“그게 나라는 건가?”
“그럼 아냐? 기억을 빼면, 현실이 달라져? 이성적 판단이란 말은 그럴싸한데, 그냥 도피한 거야 넌. 넌 루다 헤치지 못해. 그렇다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지. 두려우니까. 세상을 파괴하는 시초가 될까 봐.”
백구가 내리꽂는 비수로 명확해졌다. 루다 옆에서 온종일 꼬리를 치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거라 생각했다. 얄밉게 말도 잘해서라는 이유도 덧붙여 보았다. 하지만 백구가 싫은 건 그저 그런 질투의 감정만은 아니었다.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저 혜안이, 불편했다. 조잘거리는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은 뚫린 구멍으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들킬 것 같아서였다.
“혹시나 타깃이 될까 봐 루다 앞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더러 겁쟁이래.”
이번에는 백구가 제대로 찔렸다. 말은 루다에게 이끌려 다니는 거라면서, 루다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라면서, 비겁하게 있다는 걸 자신도 알았다.
“둘 다! 그만해!”
둘의 기싸움을 조용히 듣던 루다가 일어나며 소리쳤다.
“우리 디오는, 아직 학습 중이야. 디오 앞에서 상대를 헐뜯는 거 안 했으면 해. 보고 배운다잖아. 우리가 디오의 부모는 아니지만, 디오 곁에 있는 사람이 우리니까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모범을 보이면 좋겠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루다의 말에 페르가 크게 웃었다. 아주 우습다는 듯이.
“루다, 거울이 된다는 건 아주 위험한 발상이야. 네가 괜찮은 거울이 될 거라 확신하나?”
“바르고 선하려고 노력해 왔으니, 네가 선한 영향력을 끼칠 거라 생각하나? 한때 나의 거울이었던 파키오의 마녀도 아주 오래전엔, 인헤니를 위해 우는, 정 많고 선량한 사람이었다는데, 너는 변하지 않을 자신 있나? 큭큭. 아니, 애초에 모범적인 거울이란 게 뭔지 모르겠네. 이봐. 만약, 파트리아 사람들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 잘못을 저지른 파키오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라면? 무얼 선택할 건가?”
루다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몸서리쳤다. 자신 같은 사람이 더 태어나지 않게 막는다거나 레이가 사는 곳의 사람들을 구한다거나 하는 일은 책에 새겨진 뜻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얼마나 많은 피가 흘릴지, 얼마나 오래 싸워야 할지, 그러면 정말 할아버지가 소망한 것처럼 인간답게 살 세상이 올지, 가늠할 수 없었다.
“생각도 못 해 본 모양이군.”
페르가 비웃었다.
“야! 무슨 말만 하면 그렇게 공격적이고 무시무시해? 세상에 평화라는 말이 왜 있겠어. 협상이라는 말도 있지. 대화라는 걸 하다 보면…….”
페르의 말에 단단히 얼어버린 루다를 대신해 백구가 나섰다.
“순진하긴! 그럼, 네가 먼저 대화하러 가 보지 그래. 시체가 될 테니! 나는 도피하지 않았어. 루다를 해치지 않은 건 아직 루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지. 루다 넌? 곧 두 기차가 곧 마주칠 거야. 한쪽에는 보통의 사람들이 또 한쪽에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몇이 타고 있어. 선로를 바꾸어서 범죄자를 처단하는 게 나쁜가? 네가 망설이는 순간 하나는 분명하지. 파트리아의 미래는, 없어.”
그 말을 남기고, 페르는 올라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