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의 빈자리에 겨울밤 스산한 공기 같은 적막이 들어와 각자의 가슴을 후볐다. 수다스러운 백구마저 무력하게 구두코만 바라보고 앉았다. 디오는굵은 손가락을 쉬지 않고 불안하게 흔들며 같은 자리를 왔다 갔다 반복했다. 루다는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그림 속 사람이 된 것처럼,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걱정이 된 디오가 루다 옆으로 가서 살그머니 살폈다.
“디오야.”
“괜찮아, 디오야. 나는, 괜찮아. 페르 말이 맞아. 세상에 그냥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루다의 말에 백구가 고개를 잽싸게 튀어왔다.
“루다! 루다, 그럼 행동 개시? 자~자! 나는 행동 대원이니까 말만 하면 뚝딱! 어떤 선택이든지 난 네 편이다. 이루다.”
“나도!”
“내가 나쁜 짓을 해도?”
“그럴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넌 반드시 길을 찾아낼 거야. 그러고 혹시라도 네가 길을 잃으면 디오랑 내가 네 손을 잡아줄게.”
루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갗을 쪼개 불을 피워낼 것처럼
핏덩이를 달구는 숯이 될 것처럼
하얀 눈가루를 날릴 것처럼
달아오르다, 타오르다, 끝내
숨이 멎을 것처럼
뜨거워,
정신이,
흩어졌다.
깜깜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가 흉부를 압박했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불을 지피는 가마 속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다,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고 다시 생각했다. 달구어진 바닥을 기어서 움직였다.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릎이 타들어 가고 손바닥이 터지는 고통보다, 스러져 이곳에 묻힐 공포가 더 섬뜩해 계속 기었다. 그러면 냄새를 맡아보자. 알겠다, 집이다. 실낱처럼 희미하게 익숙한 집 냄새가 났다.
집에 왔구나. 모두 떠나버린 집에, 다시 왔구나. 홀로 왔구나.
시스템이 망가졌나 보았다. 가느다란 빛 한 줄기, 없이 캄캄한데 냉난방 시스템도 고장 난 것 같았다. 센서, 센서. 어딨어. 센서, 불 좀 켜줘. 너무 캄캄해. 센서, 나 무서워. 제발 대답 좀 해봐.
센서는, 대답이, 없었다.
센서, 부탁이야. 어딨어. 제발 문 좀 열어줘. 너무 숨 막혀.
목이 터져라,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완벽히 혼자였다. 이제 루다는 계단 앞까지 왔다. 밖으로 나가려면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흐늘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까무룩 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기다시피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 오르고, 또 오르고, 또 올라도 문은 까마득히 멀었다.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멀지? 올라가면 올라간 만큼 계단이 생겨났다. 루다는 계단을 꼭 잡았다. 어느새 계단 옆은 낭떠러지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온통 불바다였다. 불바다가 넘실넘실 키를 높이고 있었다.
루다는 조급해졌다. 얼른 올라가야 한다. 올라오는 기세가 금방이라도 발밑까지 차오를 것 같았다. 한입에 먹혀버릴 것 같았다. 루다는 일어났다. 흐늘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뛰었다. 뛰고 또 뛰어올랐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끝이다.
다행이었다. 계단이 더 늘어나지 않았다. 타들어 가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파트리아의 안전한 출입문을 두드렸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누가 좀 열어 줘. 제발! 제발!
아무도 못 듣는 것 같았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비상벨을 눌러주면 좋으련만. 아무도 없는 걸까, 쾅쾅! 더 세게, 점점 더 세게, 손이 부러져라, 문을 쳐댔다. 피범벅이 되도록, 사방으로 피가 튀도록 쳐댔다.
그러나
파트리아의 안전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땅에 달린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지상에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흙이 뿌려졌다. 문 위로 흙 다발이 쏟아졌다. 한 트럭이 쏟아졌다. 흙은 단단하게 다져지고 다져졌다. 이윽고, 콘크리트가 깔리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아래 검은 콘크리트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콘크리트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중장비가 돌아다녔다.
하늘은 파랗다.
땅은 검다.
끝도 없이.
“살려줘…살려줘. 문...문 좀 열어 줘…”
루다가 울부짖었다.
“루다, 루다, 일어나. 루다! 정신 차려! 루다! 꿈에 먹히면 안 돼! 일어나아!”
감각이 돌아왔다. 몸이 흔들리고, 뺨을 때리는 손바닥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렸다. 이름을 불러줬다. 간절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이 움직여졌다. 천천히 손을 올렸다. 잡았다. 그의 옷자락을.
빛이 쏟아졌다. 밝고 환한 빛이 쏟아졌다. 눈빛과 마주쳤다. 나를 깨운 페르의 눈빛이 떨렸다. 눈물이 가득 고였다. 금세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손을 더 올려보았다. 눈물을 닦아주어야지, 그가 우니까, 아팠다.
“무서워.”
내가 말하자, 페르가 나를 끌어안고 나의 거친 숨이 사그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토닥여줬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루다, 괜찮아? 루다 왜 그래. 응”
페르 뒤에서 백구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디오는 루다가 조금 진정하자 페르를 물리치고 침대 맡에 앉아 루다에게 물을 먹였다.
“꿈을 꾼 거야. 꿈의 암시야.”
물을 마시는 루다를 보며 페르가 대답했다.
“꿈의 암시?”
“루다에게 심어진 암시지. 파트리아에서 스캔할 때마다 눕는 곳에서 잠깐 잠들 때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암시야. 물론 모두에게 심어지지는 않아.”
“이걸 누가 심어?”
“주문자가 있지. 루다의 경우엔 새턴이 주문자고, YO가 실행했을 거야.”
“YO?”
물을 마시고 정신이 좀 돌아온 루다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응. YO는 새턴의 조력자이자, 파키오 건설 설계자 중 한 사람이지.”
“YO가?”
루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YO는 파트리아 사람 한 명, 한 명 정성껏 돌봤는걸. 다정하고 작은 고민도 들어주신 분이신데…….”
“그야, 그가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잘되어야 하니까 그랬겠지.”
“원하는 것?”
“처음엔, 파키오를 건설하는 게 그의 목표인 줄 알았어. 다들. 그런데 그는 정작 파키오에 살지 않지. 파트리아에서 어떤 기획을 한다고, 나는 생각해. 파키오 사람들이 그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파키오에 오지. 스캔 연구도, 배아 연구도, 인공 배아로 파키오인이 출산하게 한 것도, 모두 그의 작품인 걸로 알아.”
페르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걸로 그가 돈을 받거나, 어떤 이익을 얻거나 하지 않아. 그는 연구하고 실현할 뿐이지. 그런데 그가 실현하고 싶은 게 그 끝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그럼 YO는 새턴과 한 편이야?”
루다가 물었다.
“글쎄, 그렇다고 보긴 어렵지.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한 편이란 법은 없거든. 각자의 목적이 다를 테니까. 자, 루다. 이제 꿈 얘기를 해봐.”
“페르, 루다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할 거 같은데, 나중에 말하면 안 될까?”
디오가 조심스레 페르에게 물었다.
“안돼. 힘들어도, 지금 말해야 해. 생각보다 상황이 더 급박해질 수 있겠어.”
루다가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새벽 동이 텄다. 밖은 밝아오는데, 이야기를 들은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시커메졌다.
“경고장이군. 파트리아에 앞으로 일어날 일이야. 루다와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하려고 했던 일. 그런데, 계획이 빨라진 것 같군. YO가 또 한 번 역사에 남을 연구를 성공시켰나. 근데 꿈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하군. 새턴이 주문 한 게 아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