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한 세계에서
여름이 깊어지는 비가, 유리창을 후드득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리창 바깥에는 굵은 눈물 같은 빗방울이
맺혔다가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연이어
줄줄,
줄줄줄
하염없이
미끄러졌다.
금세 빗물 범벅이 되어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런데도 유리 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구야.”
천천히, 루다가 백구를 불렀다.
“백구야, 내가 유리창이라면, 나는 바깥이 될래. 안에서는 아무런 일도 겪지 않겠지만,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모르잖아. 의래 삼촌 찾겠다고 내가 찾던 책 이름이 의래고, 어쩌면 내가 가야 할지도 모를 곳의 이름이 의래라는 거, 메디움으로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야.”
유리창을 응시하던 루다의 시선이 백구에게로 옮겨졌다.
“사실 메디움에 온 건 약속보다 나를 사랑해 준 유일한 분의 간절한 바람을, 이뤄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어. 그런데 오늘 네 말 들으니 할아버지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아. 지금이 간직해 온 걸 가치 있게 할 때라는 걸. 그분들이 우리에게 전수하신 건, 단지 이어 주는 걸로만 끝나야 할 게 아닐 거야. 그래서 알고 싶어.”
“뭘 알고 싶은데에-”
식탁 위에 상반신을 뉘이며, 발을 동동거리며 백구가 답했다.
“전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알아내야 하는 게 비밀이라면, 그게 밝혀지면 안 되는 것이라면, 또 들켜서는 안 되는 대상이 파키오라면,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아? 그런데 지금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아. 우리가 보는 세상은 딱 요만큼, 우리 시야만큼이니까. 언덕을 오르면 더 많이 보이더라. 남겨주신 것의 진짜 의미를 알면, 저 바깥에 나가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알면, 그때야 비로소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또…”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워. 내가 잘못할까 봐. 그런데 나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달라질 거 같지는 않아. 그러니 알아야겠어. 우리는 정말 어쩌다 파트리아에서 그렇게 살도록 남겨졌는지, 레이가 있던 곳에서 정말 사람들이 죽는지, 이 모든 시작이 어디인지, 알아야겠어.”
백구가 몸을 일으켰다,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 너는 얌전하게 생겨 가지고 막 나서기를 좋아하냐. 알았어. 아러써어. 뭐부터 하고 싶어. 아씨, 말만 해.”
백구의 투정에 루다가 웃었다.
“아, 말하라니까?”
“아르바이트. 오늘 결국 일을 못 구하고 왔잖아. 분명히 이 스킨 산업이 뭔가 있어. 네 말대로 메디움인이 스킨을 사는 게 학습된 것이라면, 결국은 학습을 시켰다는 거잖아? 그리고 또…….”
“또 뭐.”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 조용한 애가 조용하게 치는 사고가, 요란한 애가 요란하게 치는 사고보다 더 크다는 걸 요사이에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메디움인은 어쨌든 주문 생산이잖아. 이렇게 많은 메디움인을 만들고, 일하게 하고, 돈을 벌게 하고 세금을 내게 하는 이 시스템, 이게 파키오인에게 돈 말고 또 뭘 주지?”
“그러니까 이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해 보고 싶다는 거지? 취업 희망 사유 한번 구구절절하다. 자! 그럼 일어나! 내가 또 이런 걸 잘하지!”
백구가 벌떡 일어서자 루다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이 시간에? 어딜?”
“그거야 취업 알선을 잘해 줄 사람. 어쩌면 일부 답은 알고 있을 수도 있을 사람. 네 예비 신랑 페르디다! 자고로 이런 건 권력가한테 부탁해야 하는 거야. 게다가 디오가 있잖아. 디오를 주문할 때 어떻게 했는지, 디오는 무슨 대가를 받았는지, 혹시 알아? 새턴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지, 그걸로 뭘 하는지? 뭐든 본 게 있을 거 아냐.”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순순히 우리 질문에 답해 줄까? 거기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루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구가 창문 밖을 가리켰다.
“바로 저기, 건너편 집. 너 몰라? 쟤, 너 스토커인 거?”
과연, 그랬다.
페르디다와 디오는 루다와 백구의 숙소 맞은편에서 살았다. 그것도 건물 통째로 사서. 디오가 한달음에 달려와 반겨주었다.
“어서 와! 그렇잖아도 와플 만들고 있었는데! 나는 갖다주고 싶은데 저 녀석이 한사코 안 된대서 못 갖다주고 있었거든! 이게 엄청 달콤하고 입에서 사르르 녹아. 자, 우리 루다는 푹신하게 요기 소파에 앉아. 내가 와플이랑 딱 어울리는 딸기 셰이크도 만들어 줄게. 넌! 그냥 앉고 싶은 데 앉아라.” 하고 디오는 잽싸게 페르디다를 부르러 갔다.
백구는 기가 찼다.
“여기 데려온 게 누군데!”
그래 봤자, 디오는 이미 2층으로 가고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 남자 둘이 살기에 너무 넓은 거 아냐? 넓은 정도가 아니지. 우리 숙소 건물에는 30명이 사는데. 여기 건물 크기도 비슷하구만. 방도 많겠다. 그치? 루다, 우리도 여기서 살게 해 달라고 할까? 이참에 예비 신랑이랑 좀 친해져도 보고. 좋다 그치? 야, 이루다, 너 지금 나 창피하지. 막 표정에 써 있어. 응? 너 그러면 안 된다. 사람이 말야. 좋은 걸 좋다고 해야지 겉 다르고 속 다르면 안 돼요. 여기 좋은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백구의 강요에 루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1층은 계단과 연결되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응접실 가운데에는 남색 카펫이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베이지색 소파 2개, 남색 소파 2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소파 양옆에 자리한 화분과 벽에 붙은 장식용 조명이 주변을 밝게 해 주어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명이 있는 부분을 제외한 삼면 벽은 책장이었다. 홀로그램이 아닌 진짜 종이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어 절로 눈길이 갔다. 백구는 아까 디오가 가장 푹신하다는 소파에 앉아서 무심하게 사방을 둘러보았고, 루다는 이끌리듯 책장 앞으로 가 책 등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손끝에 반들반들한 가죽 느낌이 닿았다. 꺼내 보고 싶은 유혹에 검지를 책등에 대었다 떨어뜨렸다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봐도 돼.”
베이지색 니트에 청바지를 입어서인지 페르디다의 인상은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페르디다는 빠른 걸음으로 와서 백구 맞은편에 앉았다. 긴 다리를 꼰 모습은 여유로워 보였다. 백구는 그 모습이 어쩐지 얄미웠다. 아무것도 안 해도 미운 타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지금 루다에게 필요한 인물은, 그였다. 백구는 눈꼬리를 접어 미소로 그를 맞이하며 속으로 바랐다. 마지막에 루다에게 필요한 인물은 자신이기를.
루다가 꺼낸 책은 명화집이었다. 페이지마다 한 컷의 그림이 있었고, 그림 아래에는 작가와 그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루다는 그림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눈을 그림 가까이 대보기도 했다. 그림이 종이에서 떨어지지 않는 게 아주 낯설었다.
“그건 보다시피 홀로그램이 아니야. 여기 있는 책들은 모두 옛날 책이야. 소설부터 인문, 과학, 만화도 있지. 지금 보는 것처럼, 화가들의 그림을 모은 책도 있고.”
책들은 루다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루다는 보던 책을 그대로 가지고 와 자리에 앉았다.
“뭉크의 <절규>야. 1893년도에 그렸다지. 여기엔 작품 이미지가 실린 거고. 진품은 따로 있지.”
“어디에?”
“뭐. 파키오에 사는 수집가 중 한 집에? 새턴도 그림 수집가이긴 한데, 이건 새턴 취향은 아니라서.”
“이상해. 이런 건 실제로는 한 번도 못 봤어. 절규 소리가 그림 속에 사람 입속에 삼켜져 있어. 그가 삼킨 소리가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지?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넘어졌을까. 주저앉았을까. 다시 걸었을까. 괴로움에서 도망쳤을까? 아니면 견뎌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