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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30. 2024

[ch3] 15 진짜 같은 느낌이 중요한 거지

파멸한 세계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네. 적응 기간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번번이 제 신청서만 계속 반려가 되어서 직접 왔습니다.”

“자네가 반려될 만한 곳만 골라 지원했구먼.”

왜소한 외형에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는 인재 관리인이 구부정하니 모니터를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파트리아 스킨 공장, 스킨 판매숍, 스킨 업그레이드 제품숍, 스킨 구입 및 A/S 상담 센터 등등 여긴 자네는 못 가네. 돌아가이.”

“파트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로 알고 있습니다.”

관리인이 뒤로 살짝 기대앉아 안경을 들어 올리며 루다를 올려다보았다. 먼지가 들러붙은 채 오래도록 방치된 유리병처럼 탁한 눈빛으로 구경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트리아에 온 그날부터 근 삼십 년이 다 되도록 배정된 방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어쩌다 한 번씩 있는 민원인을 상대하는 게 그의 일의 전부였다. 그조차도 자동 프로그램이 처리한 것을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는 것일 뿐, 딱히 그가 무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격 미달이니 그만 돌아가게.”

“제가요? 어디가 부족한지 말씀해 주시면……”

“차고 넘치니 할 수 없단 뜻이야.”

관리인은 심드렁하니 귀찮다는 듯이 겨우 대답하며 문 쪽을 향해 눈짓했다. 그만 나가란 소리였다. 그러나 루다가 버티자 하는 수 없이 거절된 사유와 관련된 공개된 사항들을 더 살펴보았다. 

“파키오인과 결혼할 신부는 할 수 없는 일이야. 언젠가 스킨을 구입하는 고객이 될 텐데. 예비 고객은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지, 암. 보아하니 예치금도 상당히 많은 거 같은데, 거 진짜 돈 필요한 사람 일자리 뺏을 생각 말고, 이제 그만 가 보쇼.”

기록을 끝까지 본 그는 어느덧 반존대로 말을 마쳤다.     




그렇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온 저녁이었다. 루다는 메디움 병원에서 공장식 스캔을 하기 전까지 스킨 데이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매달 해 오던 당연한 행사인 동시에 생명줄이기도 했기에, 귀찮다거나 왜 해야 한다거나 하는 그 어떤 조그만 불만도, 의문도 품은 적이 없었다.

혼자가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오히려 그것은 간절한 일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뜻을 알려면, 고객에게 질 좋은 데이터를 제공하는 A등급을 유지해야 했다. 통에 들어가는 것은 진저리났지만, 데이터 제공은 살아가는 목적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또 골똘히 하시나, 이루다?”

식사하다 말고 생각에 잠겼나 보았다. 백구의 얼굴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말갛고 뽀얀 얼굴로 어쩜 저리 항상 해사하게 웃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루다는 그의 미소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응답했다. 그러지 않으면 루다가 찡그린 미간을 풀고 웃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이었다. 백구가 다시 자리에 앉자 루다가 입을 열었다.


“있지. 스캔은 왜 하는 걸까?”

“몰라서 물어?”

질 좋은 단백질이 다량 함유된 ‘육즙 담뿍 캡슐’을 집어 먹으며 백구가 되물었다.

“파키오인과 메디움인이 필요하니까. 근데 그게 왜 필요하지? 우리 스킨 데이터를 가공해 이식하는 것보다 인공으로 만드는 게 더 영구적이고 튼튼하잖아. 실제로 인공을 쓰는 메디움인도 있고.”

“가짜잖아.”

“가짜?”

“어차피 우리 것도 가공하잖아. 찍어 낸 걸 가공해야 몸에도 맞을 테고.”

“진짜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한 거지. 너 진짜 고기 먹어 본 적 있어? 파트리아 사람 중에서 진짜 고기를 먹어 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 캡슐 안에 있는 고기 맛과 육즙이 진짜와 얼마나 같은지 우린 몰라. 그래도 옛날 사람들이 먹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은 거니까 이 진짜 같은 가짜를 먹으면서 만족해하는 거지. 만족 말야.”

“그러니까 진짜 같은 가짜 피부로 만족을 얻는다?”

“빙고!”

그렇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실타래 때문에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을 돌았다.

“파키오인은 그렇다 치고 메디움인은 왜?”

“글쎄, 잘은 모르지만 학습된 거 아닐까? 최초의 인공 인간은 옛사람을 학습했고 지금은 그렇게 수백 년간 학습된 수많은 인공 인간이 남긴 데이터를 또 학습하는 거니까. 뭔가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우월감도 가질 수 있잖아. 네 말대로 완전 인공을 쓰는 메디움인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구형이잖아. 구형은 돈을 많이 못 버는데 무슨 스킨을 사. 몸도 업그레이드 못 하는 판국에.”


맞는 말이었다. 파트리아에서 메디움인에 대해 안 것보다, 실제로 와서 본 이곳은 놀라웠다. 인공 인간의 종류부터 다양하고 많았다. 생산하는 회사도 큰 기업부터 작은 기업까지 셀 수 없었고, 생산 용도도 수백 가지는 될 것 같았다. 거리를 청소하거나 물건을 판매하거나, 파트리아인이 쓸 물건을 생산하는 일을 하는 메디움인도 있었고, 이런 메디움인을 더 발전시킬 신형을 연구하는 메디움인도 있다고 했다. 

구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되었고, 돈을 많이 버는 직군에 속하는 신형은 돈으로 새 몸을 샀다. 같은 레벨끼리 결혼도 했고, 아이를 주문해 키우기까지 했다. 매해 아이의 몸을 바꾸면서까지.

유일하게 그들이 손대지 않은 직군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스킨 관련 산업이었다. 그런 일들은 대개 파트리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했다. 아니, 정확히는 파트리아 사람들은 그런 일만 할 수 있었다. 


“넌 참 신기해. 얕은 물인 줄 알았는데 발을 담가 보면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물 같다고 할까. 어쩜 그리 아는 게 많아?”

루다의 칭찬에 백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름 뼈대 있는 집안이라구.”

“뼈대 있는 집안?”

“응. 그 아주아주아주 오랜 옛날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런 조상님이 선생님이셨대. 대대손손 구전에서 구전으로 배운 거지.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배웠고, 나도 아버지에게 배웠어. 파트리아에서 A등급을 받아서 배우는 건 옛날로 치면 어린 학생 수준인 거고! 나는 고등 교육을 받았지!” 하고 뻐기면서 본 루다의 얼굴은 놀라움에서 기대감으로 변해 있었다. 

루다는 백구 쪽으로 바싹 다가와 식탁 위에 깍지 낀 팔을 가지런히 올려놓더니 몸을 수그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아주 조용하게 물었다.

“그럼…너, 옛날 철학자들에 대해 알아? 철학이 뭔지 알지? 아니면 옛날 사람들이 만들었던 법이라던가…….”

갑자기 백구가 식탁을 양손으로 쾅 쳐서 루다의 다음 질문은 그 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얘가! 큰일 날 소리를!”

백구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친 거였지만, 루다가 놀랐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루다는 그런 백구를 가만히 봤다. 늘 밝은 백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루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 알아? 때로는 그런 것도 있어. 내가 배운 건 형벌과 같은 거야. 평생을 묵인해야 하는 형벌. 발설하면 죽게 되어 있는 무거운 지식. 그럼에도 배우고 간직하고 있는 건 언젠가 내 자식에게 알려 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야. 우리 집은 그렇게 살았어. 이 거대한 행성의 시스템에서 아주 미약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나는 그저 조용히 살다 갈 거야. 설령 내가 알고 있다 해도, 그건 지금은 가치 있는 게 못 돼.”

백구는 마치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킨 바위 같았다. 거센 풍파에도 꿋꿋하게 무거운 몸을 지탱하고서 세월을 묵직하게 견뎌 낸 모든 할아버지가 백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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