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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7. 콩깍지 씐 거지

by 조유상

"너 결혼하러 내려왔지?"

내가 결혼한다니까 풀무학교 동료교사들이 그렇게 놀려댔다.


그래, 결과를 놓고 보면 그게 맞다.

하지만 예상문제와는 달랐다. 나는 시골에서 혼자라도 농사지으며 살고 싶었고 풀무학교를 징검다리 삼았다. 농사 역시 배워야 할 게 많았고 농업고등기술학교라니 모르는 걸 배우며 차근히 흙에 터 잡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터였다. 엄마에게도 농사짓기 위해 내려간다고 하지 않고 풀무학교에 근무하러 간다고 하니 좀 안심이 되는 눈치였다. 내 꿍심은 따로 있었건만 사실대로 밝히긴 쉽지 않았다.


풀무학교에 와서 내가 맡은 역할은 후원회보를 만드는 일과 기숙사 사감(비스무리한)역할이었다. 당시만 해도 교육청 인허가를 받지 않은 학교라 재정이 몹시 어려워 무교회 회원들이나 교육에 뜻을 가진 분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빚을 갚아나가며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뜻있는 이들은 가진 게 적고 부자들은 나눌 뜻이 적다. 그런데 후원회 일이라니... 내가 누군가? 후원회보 A4용지 한 장 편지글은 그럭저럭 쓴다지만, 숫자에는 더듬벅대는 까막눈이나 마찬가지고 기숙사 사감 자격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애매모호할뿐더러 규율을 엄청 싫어하는 기질 아니던가? 어떤 틀에 부어도 부어지는 대로 모양 만들어지는 젤리 같은 유연함이 없는 좌충우돌 미시즈 조가 과연? 들이받을 건 사정없이 들이받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쓸데없는 뚝심으로 버틴 세월 짠밥이 있는데... 불안하긴 했다. 그런 나도 수도 공동체에서 만 3년 꼬박이 단련을 받다 보니 많이 동글해졌고 무엇보다 이번엔 순명을 목표로 기도하며 내려오지 않았던가? 물 수 변에 머리 혈이 모인 순(順), 모일 집 머리 밑에 한 일 자 굳게 뻗어 있고, 그 아래 입구와 두드릴 고가 모인 목숨 명, 혹은 명령 명(命), 이게 함부로 대가리 치켜들지 말고 물 흐르듯 머리를 둘 것이며 목숨을 맡기듯 명을 따른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교장 선생님 성함도 홍순명! 캬아, 이거 뭔가 단단히 옹쳐매인 듯, 그렇게 순명이란 꿰미에 엮이고 말았다. 수도공동체에 들어가며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듯이 풀무에서는 순명에 따르는 응답이었다.


꼿꼿했던 내 대가리(머리가 아니다)는 하느님께 한 대 쳐 맞고 이미 숙어졌다. 공동체를 나오기 전 총책임자 자매가 한, '자매가 있을 자리가 없는 것 같다'는 말 덕분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원장 수녀처럼 온유하고 따뜻한 어조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지만 뜻은 확실히 알아들었고 그 덕에 공동체 마당에 심어진 아름드리나무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며 섧게 울었다. 지겨운 빨래를 재밌게 하기 위해 빨래 널 때면 집게를 상의에 주르륵 꼽아놓고 노래하며 하나씩 널던 것도 이상한 아이가 되게 만들었고 배울만치 배운 고학력자가 밭에서 노동일 하고 공장 다니는 수도원인 줄 뻔히 알면서 들어온 것부터가 자매들한테는 이해받지 못할 일이었으니, 나는 의도치 않게 요주의 인물이었나 보다. 학교라는 체제에 붙들린 교수들의 진면목에 질렸던 나였건만... 나는 이해받지 못했다. 자주 팔다리가 잘리는 느낌이었고 그들은 버거웠을지 모른다. 집에서는 물론, 학교 사회에서도, 수녀원이라는 공동체사회에서도 네모칸 안에 냉큼 들어오지 않는 나는, 삐딱하고 희한한 녀석이라 여겨졌으리라. 뒤늦게 순명에 몸을 맡기게 된 것도 내 운명 한 자락의 수순이었겠지.


풀무학교에 첫발을 들이며 기숙사에 살기 시작했을 때는 7월 중순이니 학기 막바지였고 한 주쯤 후에 아이들은 방학을 맞아 각자 집으로 떠났다. 떠나고 난 뒤 급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기숙사를 기지개를 켜며 할랑히 돌아보던 나는 기함을 했다. 아이들 온기가 있던 방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목불인견,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이구석 저구석에 쑤셔 박아 놓은 빨랫감은 탕나 있었고 슬리퍼는 여기저기 길 잃은 미아가 되어 공동욕실에 내팽개쳐 있었다. 아하, 이래서 사감을 필요로 했었구나 실감했다.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교육하는 학교에서 이런 뒷모습은 버거운 모순이었다. 뭐 다는 아니었지만, 방마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었겠지 짐작은 했다.


개학을 맞아 다시 돌아온 아이들은 대체로 방문을 기세 좋게 탕탕거리며 닫았고 복도며 욕실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에, 서로 누구야~! 불러대는 목청 좋은 소리들은 일상의 까마귀 합창이었다. 목소리가 작은 편인 나는 아이들에게 때로 좌절하고 실망했지만 되도록 지청구가 아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생활 짠밥이 있던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개차반이었다. 이 점은 일본의 애농학교 학생들이 왔을 때 비교해 보니 정말 딴판, 딴 세상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엄청 조심스레 방문을 두 손으로 잡고 소리 나지 않게 여닫았고 걷는 거며 말소리도 조용하고 나긋했다. 생활에서 민폐 끼치지 않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루즈 베네딕트가 쓴 일본인에 대한 오래된 책 <국화와 칼>이 떠올랐다. 이중성에 관한 한 일본도 못지않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대놓고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로 보였다. 각자 다른 나라에 태어난 차이 밖에 없는데, 이렇게 아이들이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걸 알고 계신 교장선생님이 자격증은커녕 면허증도 없는 나를 사감이랍시고 불러들였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하나하나 빛나고 이뻤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5달 남짓 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서로 배우고 생활하며 지지고 볶았다.


농업학교라 방학을 맞아도 동물 돌보는 일과 실습포 물 주기 등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다. 학교 근처에 사는 고2 학생들이 주로 실습장학생이란 이름으로 그 일을 맡아하곤 했다. 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했는데, 가끔 실습장학생을 맡아하던 학생 둘이 빼꼼 문을 열고 선생니임 하고 부르며 들어왔다. 그 녀석들, 준*와 *호랑은 함께 봉숭아물을 손가락에 들이기도 했다. 준*는 말 그대로 준수하고 수줍은 학생이었고(지금은 지역에서 어엿한 중견이다) 또 다른 *호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장곡의 우렁이창자라는 산골짝골짝을 누벼야 들어갈 수 있는 꼬불탕 길을 오토바이로 내달리던 녀석이다. 오토바이 조심해서 타고 가~ 하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보란 듯이 쌩하고 학교길을 내려가던 두 녀석이 제일 많이 떠오르고 친구 같은 기분이다.


여자기숙사에 머물던 방학 때였다. 전국에 흩어져 유기농업을 하던 이들이 '정농회 여름연수'를 하는 모임에 어쩌다 보니 따라가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유기농업'이란 말은 흔히 듣는 말이 아니었다. 그해 여름엔 풀무원의 창시자인 원경선 씨 댁에서였다. (참고로 '풀무원'이란 이름은 풀무학교의 풀무에서 따온 말이다.) 홍동에서 여럿이 함께 갔는데, 오가며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가 어느 날 학교로 찾아왔다. 홍동에서 저농약 과수원을 하는 후근 씨였다. 그는 내게 다짜고짜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저 남자친구 많아요! 했더니, 여기 홍동에는 없잖냐고 되물었다. '음... 홍동에는 없네요' 했더니, 그니까 그냥 부담 없이 한 번 만나보라는 거였다. 결혼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래, 가볍게 만나볼 순 있겠지 했던 게 방심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콕 뱅킹이니 텔레뱅킹이 없던 시절이니 후원회일 하던 나는 수시로 돈 입출금 때문에 신협을 들러야 했다. 그이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풀무신협은 풀무학교 홍교장 선생님과 수업생(학교를 졸업해도 인생은 수업의 연장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들이 만든 의미 있는 금융기관이다. 그는 서울 영등포 봉제(흔히 요꼬라 부르는) 공장에서 형을 도와 일했었고 충북 제천 건설현장에서도 일했었는데, 그해 3월 풀무신협 전무 후임자로 내려와 있다고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교무실과 연이어져 있는 행정사무실에서 내 앞자리에 앉아 계신 시어머니 가사선생님이자 동시에 회계 일부를 맡던 샘과 그 남편인 홍성신문 편집장, 누구보다 홍 교장선생님과 연줄연줄된 수없는 사람들이 모사를 꾸며 나를 홍동에 주저앉히려는 속셈이었다. 그런 거미줄에 걸려든 젊은 여성들이 홍동에 제법 있었고, 암암리에 농촌총각 결혼시키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어주는 사람들끼리는 모종의 카르텔 같은 걸 꾸미고 즐거워들 했다. 심지어 나도 거기에 가담해 나중에 한몫 거들기도 했다. 심심한 시골에 입가심 이야깃거리로는 역시 사랑이 최고다. 사랑의 오작교를 놓는 까마귀들이 무조건 힘들기만 한 건 아니고 나름 지켜보며 쑥덕이는 즐거움이 있지 않던가. 후근 씨 뒤에는 홍 교장 선생님이 계셨고 모사꾼들은 더 수두룩했다. 그 덕에 1996년 9월 7일 일요일 오후, 우리는 실질적 중매쟁이 말대로 지금은 없어진 홍성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나는 이미 여러 입을 거쳐 상대가 풀무 수업생이란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신협에 가면 가끔 어색하게 마주치던 그는, 하늘색 남방을 주로 입고 있었는데 반팔 아래 보이는 팔뚝이 제법 실팍해 보였다. 음, 농사꾼으로 적격인 걸... 후후.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그을리고 튼튼해 보이는 팔뚝이 맘에 들었다면 이상한가? 동시에 키를 곁눈으로 슬쩍 가늠해 보았다. 아무리 봐도 동산 위에 올라서도 160이란 농담처럼, 160이 채 되지 않는 그와 내 키는 눈높이가 얼추 비슷했다.


맞선 보듯 미팅에 나가던 날, 나는 풀무학교 동료 국어교사 집 세모다랑이 작은 논 피사리를 거들기로 한 날이었다. 전날에도 일했는데 일요일 그들 부부는 일이 있어 어디를 가고 나 혼자 논김을 매다 오후에 허겁지겁 씻고 나가게 되었다. 약간 굽 있는 신발 밖에 없던 나는 동료 국어교사한테 미리 빌려둔 납작한 신발을 신고 나섰다. 혼자 중뿔나게 굽 높은 거 신고 나가 그를 내려다보긴 싫었다. 그게 나한텐 예의였으니까.


버스를 타고 홍성에 나가서 약속 장소로 갔더니 두 남자가 미리 와 있었다. 둘이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으니 서로 너니 내니 하는 막역한 사이였다. 어색한 사이는 중매쟁이 후근 씨의 입담으로 메워졌다. 근데 원래 중매쟁이는 살짝 운만 띄워 놓고 바로 나가줘야 당사자끼리 이바구가 시작되는 거 아닌가. 눈치 없는 그는(죄송! 하지만 너무했슈) 돈가스를 썰어 먹는 1차는 물론이고 2차 찻집까지, 심지어는 3차 빵집까지 따라가는 열성을 보이는 게 아닌가. 아, 이 지나친 열정 뭐임? 1차에서 이미 내 짝꿍이 될 남자는 거의 말없이 듣고 있다가 한 번씩 '너는 인마, 이제 그만 빠져라!'라고 노골적으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신나서 웃으며 '말로만 그러는 거 같은데!' 하며 엉덩이에 껌을 붙였나 도통 떠나질 않았다. 내용은 신앙에서부터 농사며 다양하게 종횡무진 이어졌는데 거의 세 시간여에 가까웠다. 지금이라면 농담과 더불어 한큐에 바로 보냈으련만 연애를 그리 많이 했어도 나는 뻔뻔해지지 못한 수줍은 사람이었던지라,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결국 3차 빵집에서 미래 내 짝꿍이 나에게 빵을 사주고 나니 이미 홍동 들어가는 막차가 끊긴 후였다. 그는 중매쟁이 친구를 보내고 난 뒤 난감해하는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마고 했다. 그의 써금써금한 프라이드를 처음으로 타고 가던 날 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어쩜 중매쟁이 속사포에 끼어들 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매쟁이 말에 내가 간간이 응대하다 문득 그를 바라보면 팔짱을 끼고 듣고 있어서 슬그머니, 이 사람 뭐야 상당히 건방져 보이는데? 하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하지만 차 타고 오는 십여분 동안 아주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말을 편안히 이어갔고 오늘 (친구 덕에) 힘들었겠다는 말도 들어 퍽 안심이 되었다. 사람 마음을 읽어줄 줄 아는 모습에 새삼 그가 달리 보였다. 콩깍지가 날아와 내 눈에 훅 덮어 씌워진 게 틀림없다. 아, 그날 센 바람이 불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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