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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8. 마이너스 아님 됐네

by 조유상

딱 세 번 만나고 프러포즈를 한 그. 나는 뭐지? 오랫동안 선택장애였던가? 맘에 딱 드는 상대가 없었나? 그래, 바로 그거였어.


1997년 9월 7일 처음 소개로 만나 주중에 한 번 주말에 한 번 더 만났고 세 번째 꽃지해수욕장에서 그가 내민 프러포즈 히든카드는 '그만 방황하자'였다. 그 외에 아무 사건이 없었다. 두 번째 만남이 학교에서 서산 AB지구를 갈 때 뜬금없이 지역민들과 같이 가게 되어 당황스럽긴 했지만, 바로 다음 날 그가 학교 서무실로 전활 해 '어제 많이 당황스러우셨지요?' 이 말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그를 다시 안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결정타였다. 마음을 알아주는 한 마디를 건넬 줄 아는 사람.


다른 아무것도 기습적이거나 엽기적이지도 않았다. 그 흔한 이벤트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겉으론 평온한데 가슴은 콩닥거렸고 그가 마음속을 어른거리며 드나들었다.



40이란 나이를 몇 달 앞둔 그가 막판 궁지에 몰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였을까? 내년 봄까지 기다렸다 결혼하자는 내 말에 자기는 죽을 거 같다는 하소연이었다. 죽으면 안 되지, 모처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짧은 두 달 간이지만 낮에도 만나고 칼퇴하자마자 쌩하니 또 만나곤 했으니 짧아도 고밀도 연애였다. 연애기간 동안 늦은 밤 데이트가 이어지는 통에 저녁이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그로선 다른 때 같으면 코피를 쏟아도 몇 번 쏟았을 거라며 신기해했다. 역시 도파민 분비 덕분이었을까. 신기하게 코피는 안 쏟았지만 죽을 만큼 피곤했단다. 할 수 없이 만난 지 두 달 만에 덜컥 초스피드 결혼을 해 버렸다. 가을이었다. 그는 39, 나는 36. 당시로는 노총각 노처녀였으니 돌아보면 우리가 시대를 한참 앞서갔던 셈? 연애하며 오가던 부여 길가엔 커다란 분홍 부용꽃들이 나부꼈다.


세 번째 만난 주말로 이어지는 주가 바로 추석이었다. 중매쟁이 사과농장에서 사과 한 상자를 미리 사놨고 함께 근무하던 수학 선생 차로 같이 집에 올라가기로 했었다. 그 선생 집은 일산, 나는 가는 길목인 구파발이었으니 마침 좋았다. 하지만 일이 되려니 그랬나? 그가 혼자 먼저 올라가야 할 급한 일이 생겨버렸고 나는 중간에 붕 떠 버렸다.


어쩌지? 주말 택배, 특히나 추석을 앞둔 명절 택배는 진즉에 끝나버렸고 동당거리는 내 마음을 들은 미래 남편이 너무나 수월하게 '내가 가지 뭐'하는 게 아닌가? 네? 아... 부모님한테는 운만 살짝 띄워놨던 터라 가게 되면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걸 텐데, 잠시 흔들렸다. 그는 이미 각오가 섰던 걸까?


졸지에 추석 명절 전날 써금써금한 그의 회색 프라이드 차에 사과 한 상자를 싣고 구파발 내 친정집을 향했다. 가기 전 미리 전화 한 통화로 같이 간다고 귀띔은 했었지. 엄마는 그의 뒷조사를 해 봐야겠다고 했지만 나는 전화로 길길이 뛰었다. 시골 동네라 다 빠삭하게 아는 처지에 선생님들이 그에 대해 말해줬고 내가 봤는데 뭔 놈의 뒷조사냐, 동네 사람들 인증이면 충분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사실 부모님한테 다 말하지 못한 사실들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프러포즈하기 전에 해준 말, 자신의 친모가 자기 밑 여동생까지 모두 7명을 낳고 그가 8살 어릴 적 돌아가셨다고 했다.(그는 사실 그때 자기가 몇 살인지도 몰랐지만, 나중에 내가 아주버님과 형님들 말을 듣고 따져보니 그랬다.) 그 뒤 짧은 몇 년 사이 어머니가 될 뻔한 여인 둘이 스쳐 지나갔고 지금 어머니는 친 어머니가 당연히 아니다. 지금 어머니는 아버님과 혼인해 살면서 가난한 살림에 아들만 둘 낳고 자기랑 나이차도 별로 안 나는 배다른 큰아들 딸부터 오랭이조랭이 딸린 자녀를 키우신 분이었다. 쉬운 고백은 아니었으리라. 당황스럽고 어려운 이야기를 결혼 전에 미리 말해주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고마웠다. 나는 엄마한테는 그의 어머니가 친모가 아니라는 말을 간단히 했을 뿐이었다. 미주알고주알 말해봤자 반감만 더 할 뿐이었으니까.



추석 전날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그가 말했다. 고속도로 자기 차로 처음 타보는 거라고. 아니, 정말요! 갑자기 불안이 덮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지만 우린 이미 중간을 달리고 있었고 두려워도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어깨 앞쪽 손잡이를 잡게 되었다. 어차피 빼든 칼자루, 사과라도 잘라야 할 판이었다. 사랑은 용기를 무기로 장착하는가? 그렇게 막히는 초행길을 달리고 또 달려 집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구파발집 2층을 오르는 그의 심정은 어땠으려나? 이판사판, 두근두근?



집에 들어서자 엄마는 오빠들이 여직 기다리다 좀 전에 갔다고 전했다. 분명 오빠들을 대동하고 내가 데려올 사람을 가늠해 보고 싶었던 게다. 휴, 갔다니 다행이다. 그가 부모님께 절하겠다고 하자 엄마는 갑자기 일어서서 부엌 쪽으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그는 할 수 없이 아버지께만 절을 올리고 어정쩡히 앉았다. 엄마는 절 받으라는 말을 무시하고 혼자 저쪽에서 서성였다. 워낙 늦은 밤이어서 잠시 인사말과 몇 가지 신상만 묻는 말에 답하고 그는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냐니까 영등포 둘째 형님네로 가마고 했다. 어색하고 황망스레 그를 보내고 나서 집에 들어오자 엄마의 악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무지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절도 안 하고!" 아니, 이건 뭐지? 엄마가 안 받고 도망가 놓고는? 나는 따져 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엄마는 대번에 그를 보자마자 실망했던 거였다. 친어머니도 아닌 상황에 집은 가난하고 형제자매는 9이나 되지, 자기 딸은 대학원 졸업에 상대는 대학도 졸업 못한(방통대 다니다 만)... 이 심한 기울기를 한눈에 알아본 거다. 게다가 그 모든 조건이 왈칵 다 짧은 키에 압축되어 괘씸죄가 가중처벌되었다.



나는 당시 거기까지 세세히 짚어보지 못했었고 사람을 알고 있었기에 조건 따위는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엄마가 느꼈을 당황스러움과 억울함, 엄마가 재는 조건이 하나 납득되지 않았고 공감은커녕이었다. 아버지는 별말씀 없이 잠잠하셨지만 엄마는 소릴 지르며 이 결혼 반대다! 외치며 안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며 '빵점!'하고 소리쳤다. 그래, 처음으로 내가 괜찮은 사람을 데리고 왔건만 반대하면 난 앞으로 평생 혼자 살 거다, 결혼 같은 건 안 거니까 앞으론 입도 뻥끗하지 마! 맞짱 뜨며 거칠게 내 방문을 쾅 닫고 굴을 팠다. 하지만 '빵점'이란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피시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흐음, 마이너스 아님 됐네!


나중에 내 말을 들은 그도 똑같이 말하는 게 아닌가. '으음, 마이너스 아님 됐네!' 이래서 천생연분이었을까.


우린 그렇게 빵점에서 새로 시작했으니 홀가분했다.





#시작이 빵점 #빵점부터 시작 #빵점 #빵점이면 어때 #빵점이 뭐 어때서

#바닥부터 시작 #시작이 좋아


















추석 전날 같이 올라간다는 말을 전하자 엄마는 오빠 둘을 집에 오라고 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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