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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10. 문명보다 낭만

by 조유상

그 해 추석을 지옥처럼 보내고 얼마 후, 우리 남매를 만나러 서울을 갔었다. 미래 작은 사위에게 '빵점'을 외치고 나서 엄마는 언니한테 하소연 늘어지게 했을 테지. 13살 위 언니는 전화해 우리를 따로 보자고 했다. 오빠들한테는 미리 말을 안 했지만 언니한테는 그이가 무지 못 생기고 짜리 몽땅하다고 귀띔해 두었었다. 예방접종을 한 셈. 막상 그를 만나본 언니는, '사람 괜찮더라, 진국이고, 못 생기지도 않았더구먼' 하며 '걱정하지 마, 내가 엄마한테 잘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하는 거였다. '내가 앤가, 나이 36이나 먹었는데 뭔 걱정을' 하며, 부모의 반대완 별개로 이미 결혼하기로 작정했으니 흔들리지 않았다. 큰오빠는 노코멘트였지만 작은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고 동생을 믿으니, 내 선택을 믿는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작은 오빠와 그는 58년 개띠 동갑내기인데 그때부터 지금껏 두 사람 여전히 사이가 좋다.)



신기하게 그도 자기 식구들한테 나를 소개하며 못생겼다고 말했다니 우리 둘 다 왜 이렇게 비슷한 게 많은겨? 빵점에 대한 태도까지.



결혼하기 전 나는 그가 사는 집이 너무나 궁금했다. 풀무학교 선생님들은 그 집 형제들이 거의 풀무 출신이니 집안 사정을 소상히 알고 계셨다. 나는 대략 어디쯤이라는 것만 알고 있어서 학교일이 끝나면 마을도 익힐 겸 자전거로 여기저기 홍동 마을을 탐사하듯 돌아다니곤 했다. 그중 제일 관심사는 물론 그가 사는 마을이었다. 그 어귀도 갔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기를 잘했다. 선입견을 갖게 되었을 테니까. 나중에 그와 함께 결혼 전 잠시 다녀온 적은 있지만 초라한 여느 시골집이었다. 높다란 툇마루가 일자로 나 있고 작디작은 방 세 개가 조르라니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들앉은 흙집에 부엌도 옛날 흙바닥 불 때는 그대로였다. 그 집에서 9남매 오랭이 조랭이 어찌 다 살았을까 놀라웠다. 결혼 전 딱 한 번 잠시 들렀던 그 시댁에서는 밥 먹은 기억도 없다. 도시 근방에서 살던 어릴 적 우리 집은 그래도 살뜰한 엄마 덕에 뜰도 아기자기 갖춰 있고 마루도 분합문이 달린 양옥집이었건만 여기 오니 시대를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온 느낌이었다. 다행히 그 가난스러운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던 건 이미 수녀원에서 자발적 가난을 미리 살아봤던 까닭이었다. 앞에 둔 가난 역시 내가 선택한 것이었기에 하나 부끄러워하거나 쭈뼛거려지지 않았다.



결혼 전 시댁 식구 집을 찾아간 건 홍성 근처 갈산에 사시는 바로 위 형님댁뿐이다. 마침 시어머니 생신이었나 보다. 친어머니가 아니어선지 모인 형제는 그 바로 밑에 시동생들만 와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형님 댁은 어려워 보였다. 열심히 귀여운 머심아 쌍둥이 키우며 농사짓고 부업으로 애완용 강아지를 키워 팔고 계실 때였다. 여기저기서 어린 강아지들이 깽깽 대며 짖고 있는, 산 아래 허름한 집이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내 동서가 될 형님은 바쁘게 음식 장만해 상을 들이기 직전이었다. 상을 들고 들어가기 전, 그의 형님이 부모님이 계신 안방을 무릎걸음으로 다니며 걸레질하시는 게 아닌가. 우리 집에선 생전 못 보던 모습에 속으로 놀라웠다. 당황스러워 내가 하겠다 했지만 아주버님은 꿋꿋하게 당신이 마무리하셨고 상도 형제가 같이 들고 들어갔다. 우리는 차례를 지내도 여자들이 부엌살림과 청소를 다 하는 집이었는데,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속눈이 띄었다.



잠시 그 얼마 전으로 돌아가 본다. 풀무학교 선배인 동네 형네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그 형은 우리 보고 추울 때 결혼해서 꼭꼭 끌어안기 좋겠다며 농담하다가 미래 내 남편에게 결혼하면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할 거지? 하고 농담하듯 물었다. 결혼에 대해 아무런 밑그림조차 그려놓은 게 없던 나로선 그런 구체적인 생각을 해 본 적이 사실 없었다. 다만 두어 달 전까지 모르던 타인과 한 지붕 아래 같이 24시간 붙어 산다는 게 가능할까 가 결혼을 앞두고 한 젤 큰 고민이자 과제였다. 근데 살림이라니. 동네 형의 말을 듣고 내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시선을 슬쩍 비끼며, "기대하지 마"라고 말하던 그. 매사 곧이곧대로 알아듣던 나는, 아, 이 사람, 안 할 모양이네. 지레 포기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 실망스러웠다. 사람 잘못짚었나? 하고.


그랬는데 시아주버님이 제수가 될 사람이 온 날, 무릎을 접고 방 닦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찌 충격이 아니었겠는가. 충격을 넘어 감동이었다. 그렇게 그의 가족 일부와 대면을 하고 밥을 같이 먹는 자리는 어렵지 않았다. 마음으로 이미 식구가 되어 훈훈했다.


아버님은 우리가 결혼을 한 뒤 두어 달 후 곧바로 부엌을 개조하셨다. 서울서 새 며느리가 오는데 너무 불편할까 싶어서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달랐다. 부엌 앞, 쌀가마니를 넣고 나무널판을 위에서 아래로 끼워 넣던 곳간을 부시고 손때 묻은 가마솥을 떼내고 싱크대를 놓았을 때의 실망감이라니. 아버님 손수 만드신 그 입식부엌이 어째 낯설고 어설프기만 했다. 쥐가 자유분방하게 드나들었을 시골집 정겨운 풍경 하나가 그렇게 아쉽게 사라져 버렸다. 형님들은 당신들 시집올 때와 달라진 아버님의 변화에 저으기 놀라워도 부러워도 하셨지만 고마운 마음과 달리 그 변화가 썩 반갑진 않았다. 바람이 헐렁히 불어오던 옛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기 을씨년스럽긴 했어도 형님들과 다 같이 하는 거였고 불 때는 걸 좋아했던 어린 낭만과 치기가 살아 있을 때였으니까.



문명보다 낭만이 우선이었다.



#함께 산다는 것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기 #가난은 다 보여 #정겨운 가난 #자발적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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